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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토탈리콜〉에 대한 다른 생각

〈레프트21〉 88호에 실린 권도반 씨의 ‘영화 〈토탈리콜〉을 보고 – 자본주의를 리콜하자’를 읽고 친구와 〈토탈리콜〉을 보러 갔다. 원작 소설이나 1990년의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에, 글에서 “노동자들의 소외된 삶”, “현실 자본주의 국가 지배자들의 모습”, “’용산참사’”, “국가보안법”, “콜로니 대중 스스로의 해방” 등을 생각나게 한다는 평이 더해져, 기대가 컸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는 내 기대와는 달랐다.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이 영화는 명성이 자자한 SF 소설가인 필립 K. 딕의 단편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를 리메이크한 1990년 작 영화 〈토탈리콜〉을 리메이크한 영화다. 원작의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주요 테마는 기억을 잃고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데서 오는 정체성 혼란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저질렀다는 것을 기억도 못하는 죄로 쫓겨다닌다.

1990년 작은 여러 모로 괜찮은 주류 SF 영화였다. 화성 풍경을 담은 장면은 당시로서는 CG의 혁신이었다. 여러 돌연변이들이 등장하는 장면도 당시 기술로는 수준급의 특수 분장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 특수효과들과 CG 그리고 화성이라는 장르적 소재는 영화의 메인 테마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진정 ‘괜찮은 영화’였다. 돌연변이가 당하는 차별과 부당하게 생명을 위협받는 사건은 주인공의 핵심적 갈등과 연결돼 있었다. 자신이 군벌의 주구였는지, 해방과 정의를 위해 싸우던 투사였는지 고민하던 주인공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바로 그들의 기괴함과 그들이 당하는 차별을 보고 자신이 누구인지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과거의 내가 누구였건 지금 여기에 있는 차별과 부당함에 맞는 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소재와 주제는 서로 갈마든다. 장엄한 화성 풍경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한 세기 동안 SF 장르가 쌓아온 화성 신화에 보내는 헌정이다. 요컨대, 그들은 이 소재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물론, 1990년 작 〈토탈리콜〉은 당시 기준으로 봐도 최고의 영화는 아니었다.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장면과 설정도 많았고, 스토리가 비약하는 부분도 꽤 있다. 무엇보다, 주연 배우였던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뻣뻣한 연기란!)

얼기설기

이번에 본 2012년 작 〈토탈리콜〉이 실망스런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 제작자들이 가장 공을 들인 중력열차나 추격 신과 같은 경쾌한 액션 신, 콜로니 풍경의 디스토피아적 묘사는 그저 시각적 쾌감을 주는 풍경일 뿐이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인 테마, 핵심 갈등 지점인 정체성의 혼란과 그 해소를 향한 투쟁은 현란한 CG와 공명하지 못하고 부유한다. 마치 두 개의 다른 영화를 얼기설기 꿰메어 놓은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이 소재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군다. 영화 홍보에서 가장 미는 ‘중력열차’ 장면을 넣은 이유가 중간에 잠시 무중력 상태가 되니 우주비행 느낌을 줄 수 있어서(감독 렌 와이즈먼)라고 하니, 어쩌면 영화평론가 황진미 씨의 촌평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영화는 그런 의문 따위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강화된 세트와 볼거리에 치중하느라, 혼란에 빠진 주인공이 고뇌할 짬도 주지 않고 몰아친다. 콜린 파렐은 뻔히 알려진 줄거리를 완주하느라 꽤 피곤해 보이는데, 이는 흡사 ‘토탈 리콜’이라는 게임 속에서 동분서주하는 아바타처럼 느껴진다.”

사실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실감나게 그린 SF는 많아도 너무 많다. 〈매트릭스〉 시리즈 같은 비교적 최신작부터 1966년 작 〈화씨451〉 같은 고전에 이르기까지, 거의 ‘유구한 전통’이라 할 만하다. 〈메멘토〉, 〈매트릭스〉, 〈인셉션〉을 본 관객들이 정체성 혼란이라는 테마를 신선하다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두 테마 모두 기독교 경전에도 등장할 만큼 오래된 테마다. 2012년 작 〈토탈리콜〉이 특별히 감탄할 만한 무언가를 만든 것도 아니다.

요컨대 새롭지도 잘 짜여 있지도 내용이 좋지도 않은 2012년 작 〈토탈리콜〉은, 좋은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굳이 찾아 볼 이유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런 영화보다는 괜찮은 최신 SF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두 편의 할리우드 주류 SF 영화를 추천한다.

아랍 혁명이 분출하던 2011년에 리메이크되어 나온 〈혹성탈출:진화의 시작〉은 명백하게 반란과 저항을 옹호하면서도 스토리와 화면 구성, 테크닉도 매우 훌륭한 좋은 작품이다. 학대의 희생양이던 침팬지들이 겪는 고통과 분노가, 훌륭한 모션 캡쳐 기술로 손에 잡힐 듯 구현된다. 여러 모로 아이티 혁명의 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를 떠오르게 하는 침팬지 주연배우(?)의 감정 표현은 영화 속 다른 모든 인간 배우들의 표현을 훌쩍 앞지른다. 1968년에 나온 원작 〈혹성탈출〉도 당시 강력하던 흑인 공민권 운동의 영향과 핵전쟁의 공포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수작인데, 이번 리메이크도 훌륭하다.

이보다 가벼운 SF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2008년에 나온 픽사 애니메이션 〈월-E〉를 권한다. 환경오염으로 멸망한 지구에서 수백 년째 반복 노동을 하던 기성품 로봇이 사랑과 경이,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와 행동의 중요성을 표현하는 것을 보노라면, 울컥하는 장면이 한둘이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에 갇혀 이름과 개성을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에게 짙은 감동을 주는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