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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에 걸린 박근혜 복지
맞춤형 복지에서 맞춤형 사기로?

취임식도 하기 전에 박근혜에게 복지 공약을 내팽개치라는 우파의 주문이 빗발치고 있다.

“공약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우선순위를 정해서 추진해야 한다.”(새누리당 의원 정몽준)

“예산이 없는데 ‘공약이므로 공약대로 하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공약을 다 지키고 퇴임한 정부는 단 하나도 없다.”(새누리당 최고위원 심재철)

새누리당 정책위 부의장 나성린은 “전 어르신에게, 즉시 주겠다”(11월 5일, 박근혜)고 한 기초연금도 “올해부터 20만 원씩 지급한다고 한 적이 없다” 하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조선일보〉 윤영신은 “우리에게 아직 내핍할 줄 아는 DNA가 남아 있[다] … 국민은 씀씀이를 줄이고 고통을 감내하며 미래를 헤쳐 갈 준비가 돼 있다” 하며 복지는커녕 아예 내핍 정책을 주문했다.

복지 확대가 도덕적 해이를 낳을 것이라는 기획 기사도 부쩍 늘었다.

이런 압박에 박근혜는 일단 입막음만 하는 듯하다.

“대선 때 공약한 것을 지금 와서 ‘된다, 안 된다’고 얘기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그런 것은 새 정부가 출범한 뒤에 할 일[이다.]

박근혜의 복지 공약에 사기성이 짙다는 것은 선거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박근혜는 모든 공약을 시행하는 데에 5년 동안 1백35조 원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는 실제 필요한 예산의 절반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물가인상률 같은 기본적인 수치도 반영하지 않고 억지로 꿰어 맞춘 것이다.

최병호 한국보건사회연구원장은 세 가지 공약(기초연금, 4대 중증질환 보장, 기초생활보장 확대)을 시행하는 데만 앞으로 4년 동안 77조 5천억 원이 필요하다고 발표했다.

“여기에다 무상보육·일자리확대·장애인지원·노인복지 등 7대 복지 대선 공약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따져보니 2017년까지 4년간 매년 평균 26조 4천억 원 등 모두 1백5조 원이 더 들 것으로 추계됐다.”

재원 마련 계획도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예산 절감과 세출 구조조정으로 71조 원, 세제 개편으로 48조 원, 복지행정 개혁으로 10조 6천억 원 하는 식이었다.

〈조선일보〉조차 “현실을 몰라서 우기는 소리”라고 꼬집었다.

그나마 올해 예산에 반영한 건 고작 2조 4천억 원에 지나지 않는다.

박근혜의 엉터리 셈법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사실 지금 같은 경제 위기 시기에 1퍼센트에 기반을 둔 박근혜가 복지를 크게 늘리겠다고 한 것 자체가 엄청난 모순이다.

그러려면 큰 돈이 들 텐데 문제는 돈을 어디서 마련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국채 발행은 저들이 택하기 힘들다. 국채 발행으로 재정 적자가 늘어나면 국가 신용 등급 등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게 지배자들의 우려다.

증세는 재벌과 부자들이 질색한다. 박근혜도 “지금과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세율을 인상해 기업활동 위축시키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처럼 박근혜는 복지 확대와 재정건전성, 증세라는 ‘트릴레마’(딜레마 —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 — 를 세 가지 선택에 빗대 만든 말)에 빠져 있다.

박근혜에게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다.

첫째, 우파들의 주문대로 공약을 폐기 수준으로 후퇴하거나 말을 바꾸는 것이다.

트릴레마

‘4대 중증질환 1백 퍼센트 건강보험 적용’ 공약이 대표적이다.

대선 TV 토론 당시 문재인은 “왜 심장은 되고 간은 안 되냐?” 하고 이 공약의 한계를 비판한 바 있다.

그런데 이제 간병비나 4인실 이상 상급 병실료, 선택 진료비는 보장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면 사실상 나아지는 게 거의 없다.

둘째, 복지 비용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그렇게 자본가들의 부담을 더는 한편 복지 확대로 생겨나는 효과는 자본가들이 가져가게 할 수 있다.

예컨대 노동자들의 사회보험료를 인상하거나 국민연금 기금을 활용하면 복지를 확대하면서도 자본가들의 부담은 줄일 수 있다.

근로소득세나 부가가치세 같은 간접세, 담배·술 등에 붙는 징벌적 세금을 인상할 수도 있다. 이런 조처는 일시적인 복지 재원 마련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노동자 전체에게는 생활수준을 낮추는 일종의 내핍 정책이다.

이렇게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식으로 생색내기 수준으로 복지를 늘리는 것은 자본가들도 굳이 꺼릴 이유가 없다.

사실 자본가들도 어느 정도는 복지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단순히 노동자를 쥐어짜는 것을 넘어서 노동력의 질을 높이고(교육), 의욕을 끌어올리고(연금), 건강하게 유지하는(의료) 데에도 투자해야 한다. 한국 자본가들에게는 출산율을 끌어올려야(보육) 하는 시급한 과제도 있다. 다만 자본가들은 서로 이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유럽 복지국가에서도 강력한 국가 권력이 이런 반발을 위에서 누르거나,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의 불만과 행동이 자본가들의 양보를 이끌어 낼 때에야 복지가 도입되곤 했다.

그럴 때조차 복지 비용을 노동자들이 부담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결과 20세기 후반에 유럽의 주요 복지국가에서 노동자들이 받은 복지 총액이 노동자들의 세금 총액과 같았다는 연구결과들이 많다. 복지국가가 ‘계급 내 재분배’였다는 비판이 나오는 까닭이다.

이 점에서 진보진영 내 일부에서 ‘보편적 증세’론을 펴는 것은 우려스럽다.

이미 노동자들이 부담하는 복지 비용(보험료)이 지나치게 큰 상황에서 이런 주장은 자칫 박근혜의 고통 전가에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런 보편적 증세론은 노동자들을 이간질시켜 각개격파하려는 박근혜의 계획에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에게 투표한 수백만 명의 하층 중간계급과 일부 미조직 노동자들은 불만을 느낄 것이다. 경제 위기 상황과 맞물려 그 불만이 폭발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박근혜의 추락은 시간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사실 복지를 대폭 확대할 돈이 없다는 우파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기업주들의 사회보험료 부담을 OECD 평균 수준으로만 늘려도 매년 약 30조 원의 재정을 마련할 수 있다. 감사원조차 총체적 부실로 인정한 4대강 사업 등 건설사들의 배만 불려주던 각종 토목 예산과 경제규모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의 군비 지출도 줄여야 한다. 투자되지 않고 쌓여 있는 기업과 부자 들의 재산에 세금을 부과하면 박근혜가 약속한 것보다 훨씬 많은 복지를 시행할 수 있다.

따라서 민주노총이 지적한 것처럼 진보진영은 “부자와 대기업의 증세에 눈 돌려야 한다. 재원확충이 어렵다고 축소되거나 후퇴해서는 안 된다.”

진보진영은 박근혜의 복지 후퇴를 폭로해 노동자들의 사기를 고무하는 한편 노동자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부자 증세와 복지 확대 요구를 중심으로 투쟁을 건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