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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로 세상보기:
저들이 민영화를 추진하는 이유

1980년대 이후 전 세계에서 거의 모든 정부가 민영화를 추진해 왔다. 미국의 레이건 정부와 영국의 대처 정부는 이를 이끈 대표 사례일 뿐이다.

민영화는 1970년대 이후 침체에 빠진 세계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조처로 여겨졌다.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정부한테 민영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그러나 전 세계적인 민영화 조처에도 경제 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경기 회복이 있기는 했지만, 세계 자본주의는 여전히 1970년대 이전 수준의 이윤율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 민영화 추이 민영화는 거대한 도둑질이나 다름 없다. ⓒ자료 The PB Report 2011. KPMG

무엇보다 오늘날 세계경제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대 규모의 경제 위기를 겪고 있다. 이 경제 위기가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이런 물음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수십 년 동안 민영화가 체제 전체에 진정으로 끼친 영향은 무엇이었는가? 도대체 저들은 왜 여전히 민영화를 추진하려 하는가?

이 물음에 답을 얻으려면 좀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체제 전체를 봐야 한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부터 ‘장기 호황’ 시기(제2차세계대전에서 1970년대 초까지)에 이르기까지 약 50년 동안, 대세는 민영화가 아니라 국유화였다. 히틀러뿐 아니라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국가가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다.

각국 정부들은 1930년대 대공황을 겪으면서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그중 하나는 거대 자본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세계 시장에서 국민국가의 뒷받침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지배계급이 낱낱의 사적 소유주로서 착취하기보다 그들이 장악한 국가를 이용해 집단으로 착취할 때 훨씬 효과적이었다는 것이다.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는 흐름은 1970년대까지 계속됐는데, 구소련과 동유럽 같은 나라들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서방 자본주의의 보루 구실을 한 한국과 대만에서도 국가가 통신·정유·항만·조선 등 주요 산업을 운영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세계경제가 호황을 누리는 동안 이런 믿음은 현실로 뒷받침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이윤 추구 드라이브는 자본주의에 연속적인 변화를 낳는다. 한때는 당연시되던 것들이 의문시된다.

1960년대 말에 체제 전체의 이윤율이 추락하면서, 자본가들이 기존 투자에서 거두는 이익이 줄었다. 새로 투자할 곳도 찾을 수가 없었다. 정부는 즉각 기업에 대한 세금을 낮추라는 압력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경기가 침체하면서 조세 수입 자체가 줄었지만, 실업자가 늘면서 복지 지출은 오히려 늘었다.

그 결과 나라 빚(재정적자)이 늘면 이는 다시 국내 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높아졌다.

감세와 복지 삭감, 공공부문 민영화 등으로 이 늪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게 됐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라고 알려진 정책들이 주류로 자리 잡게 된 배경이다.

민영화는 한편에서는 국가 지출을 줄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에 새로운 투자처를 제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여겨졌다.

신자유주의

오늘날에도 민영화를 추진하는 자들이 가장 큰 명분으로 삼는 것은 비용 절감과 효율 증대다. 그들은 국영 기업이 노동자를 필요 이상으로 고용해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민영화의 효과를 평가한 국내외 연구에서 민영화로 생산성과 효율이 높아졌다는 결과를 얻은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2011년 12월 한국조세연구원이 발표한 ‘공기업 민영화 성과 평가 및 향후과제’를 보면 “실증분석 결과 공적지분율이 높을수록 노동생산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 즉 공적소유권 기관의 경우 노동 투입 대비 효율성이 좋다.”

또 민영화를 통해서 수익성을 올린 경우는 정부 통제를 벗어나 가격을 맘대로 올려서인 경우가 많다. 통신사와 석유 등 에너지 기업 민영화가 대표적이다.

1990년대 중반 영국에서 발표된 연구 결과를 보면, 민영화를 위한 매각 준비 단계에서 대규모 정리해고와 임금 삭감을 통해 수익성을 올린 경우도 많다.

그런 효과는 대개 4년을 넘기지 못했다. “11개 기업 중 7개는 경제 전체 성장률보다도 성장률이 낮았다.”

결국, 민영화는 경제를 살리지도 못했고 효율을 높이지도 못했다.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수익성 향상조차 민영화의 결과가 아니라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노동강도를 높여 얻은 것일 뿐이다.

노동자들이 민영화 정책에 맞서기 시작하고 자신을 지킬 방법을 습득하면서 이런 효과는 더욱 반감됐다. 반대로 KT처럼 정부와 사측이 노동조합을 체계적으로 파괴해 노동조건이 크게 후퇴한 경우 다른 민영화 사례보다 더 큰 수익을 거뒀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민영화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최대 골칫거리라고 지적한 이윤율 저하 경향을 거스르지 못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정부는 여전히 민영화를 추진하려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본가들의 ‘근시안적’ 태도 때문이다. 위기가 체제 전체로 확산될수록 자본가들은 장기적 계획보다 즉각적 대응에 매달린다. 개별 자본이나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가능성보다는 그 자신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 이후 재생에너지 사업이 하향세로 접어들고 석유 기업인 엑손모빌이 애플을 제치고 시가총액 1위 자리를 탈환하는 현상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체제 전체를 위해서는 자본가들도 기후변화를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누구도 나서서 십자가를 짊어지려 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국내외 대자본들은 국유 부문에 돈벌이 기회가 없는지 눈을 돌리고 있다. 이들과 수천 가닥의 연줄로 연결된 국가 관료들과 주류 정치인들은 이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인다. 철도나 전력 기업을 나누고 매각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면 일거양득이다.

장기적으로 재정 적자를 줄일 수 있다면 재벌·부자 감세도 더 늘리거나 오래 유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배계급 전체로 보자면 이데올로기적 필요도 중요하다. 지배자들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아니라 공공부문을 경제 위기의 원인처럼 보이도록 하려 한다. 이런 속죄양 삼기를 통해 시장과 경쟁이 최선이라는 믿음을 퍼뜨리려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모두 노동계급에는 재앙이다. 민영화를 막아야 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