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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북한 핵 비판 논쟁:
장한빛 동지의 오해 혹은 오독에 대한 반론

송하나 씨가 3월 25일 “북한에게 핵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고 본다”를 보낸 바 있다. 장한빛 씨가 이에 대한 반론(“북한 지배계급의 핵무장을 ‘존중’해서는 안 된다”)을 보내 와 게재했다.

이 글은 송하나 씨의 재반론이다. 

장한빛 동지의 반론은 내 글에 대한 반론이 아니라 본인이 머릿속으로 설정한 상대에 대한 반론이다. 장 동지가 생각하는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1. 북 정권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2.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이 승리한 건 군사적 수단 덕분이다.

3. 제국주의에 맞선 인민적 저항과 국제적 연대는 가망 없다.

4. 그러므로 북한의 핵 보유는 정당하고, 이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내 글에 대한 오독이거나 왜곡이다.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1. 핵과 북한 사회를 바라봄에 있어 북한 지배계급과 민중을 구분해야 한다.

2. 현재 북한의 조건과 미국의 군사력으로 볼 때, 북한이 베트남과 같은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건 힘들어 보인다.

3. 국제적 저항 운동 건설은 북한 정권이나 북한 민중의 몫이 아니라 우리의 몫이다.

4. 반제국주의 운동의 건설을 위해서는 북한의 핵 개발이 제국주의 압박의 불가피한 결과물이라는 점을 강변하는 것이 이롭다.

나는 북한 정권의 목적은 미국에게서 체제를 인정 받고 세계 체제에 편입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세계 혁명의 추동자가 될 수 없다고 썼다. 현재의 북한 사회는 “병영 사회”이며 비정상적인 체제라고 썼다.

북한 사회 변혁의 주체는 북한 민중 자신이어야 하며, 제국주의적 압박으로 체제가 붕괴하는 건 북한 민중에게 재앙이라고 썼다.

저항 운동을 건설하는 것이 가망 없다고 하기는커녕 “세계적 차원의 반제 대중운동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도 추상적 수준의 ‘모든 핵무기 반대’만을 외치는 게 아니라 궁핍한 나라를 핵무장으로 내모는 제국주의를 폭로하는 게 보다 정당하고도 이롭다”고 썼다.

우리가 할 일은 “제국주의를 약화, 패퇴시키는 것”이며 이 과정과 결과 모두를 통해서 “한반도와 전 세계 노동계급의 변혁적 대중운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분명히 썼다.

장 동지가 나를 북한 정권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거부하는 자로 모는 태도는 침략 전쟁을 정당화 하는 미국의 태도와 닮았다. 그들은 아프카니스탄 침략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당신은 탈레반과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자행하는 명예 살인과 여성에 대한 탄압을 지지하는가, 그런 일이 벌어져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미국의 침략 행위가 패배하기를 바란다는 사실이 탈레반의 모든 행위를 긍정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없듯, 제국주의의 상시적 전쟁 위협에 반세기 넘게 시달리는 북한 민중의 입장을 존중하는 것이 북한 사회 전체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를 전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북한의 전부를 지지한다고 하지 않았다. 나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서 현존하는 어떤 자본주의 국가도 일백 퍼센트 완전히 지지할 수 없다. 나는 북한 민중이 “피억압 국가의 일원”이라는 맥락에서 그들을 존중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나는 북한 지배계급에 맞선 저항이 없으니 북한 사회가 정당하다고 하기는커녕, 북한 민중이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용인하는 것은 제국주의의 압박에 기인한 바가 크고, 제국주의의 패퇴는 북한 사회 변혁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썼다.

장 동지는 북한 사회가 “북한 민중이 반대를 표현할 기회도 권리도 갖지 못하고 있는” 사회이며, 따라서 북한의 핵개발은 오로지 북한 지배계급의 의사를 반영할 뿐이라고 여긴다. 이 역시 우익의 논리와 빼닮았다. 우익은 북한의 민중을 세뇌된(우매한) 존재, 혹은 폭력에 지배당하는(불쌍한) 존재로만 본다. 그들에게 북한은 곧 북한 지배계급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는 북한 민중을 괴롭히는 각종 비인도적 제제를 일삼으면서, 그것을 북한 독재자에 맞선 ‘정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장 동지는 그저 현재의 북한 사회가 비민주적이라는 점을 서술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런 비정상적인 체제가 어째서 지금껏 민중의 대규모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는지 설명해야 한다.

물론 북한 사회는 국가자본주의 국가이며, 북한의 지배 계급은 통치를 위해 이데올로기와 공안 기구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한 나라가 60년이 넘게 ‘병영 사회’를 유지해 온, 세계사적으로 유례없는 사실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이건 북한의 민중을 세계사적으로 유례없이 나약하고 멍청한 존재로 상정할 때에야 가능한 폭력적 접근이다.

핵 개발은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일이다. 북한의 민중도 자신들이 궁핍하게 지내온 그 나날, 많은 비용과 노력이 핵 개발에 쓰였다는 것을 모를 수 없다. 그럼에도 그 나라의 민중은 그와 관련해 어떤 대중적 저항도 시도하지 않았다.

이 현상을 단지 북한의 민중이 멍청하다, 혹은 북한의 공안기구가 강력하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합리적 접근도, 내재적 접근도 아니다.

[첨언하자면, 나는 만약 북한의 민중이 반독재 투쟁에 나선다면 그것이 설령 혁명적 관점이 아니라 서방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불붙은 저항은 충분히 좌경화, 급진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이 군사적으로 승리했다고 쓴 바가 없다. 장 동지가 설명한 내용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당연한 상식이다. 베트콩들의 영웅적이고도 끈질긴 투쟁은 세계적 반전 여론을 지폈고 민중이 저항에 나설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미국이 더 이상 군비 지출을 감당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이로 인해 결국 미국은 베트남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베트남의 전국토가 파괴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게다가 최근 수십 년 간 미국의 군사적 수단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냉전의 긴장 관계는 해체됐다.

냉전은 세계 민중에게 재앙이었으며 수많은 대중 운동의 분쇄와 왜곡, 각종 군사적 충돌을 낳았지만 동시에 제국주의 국가가 최후의 수단, 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강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2차 대전 이후 벌어진 전쟁에서 핵은 종종 언급되었어도 결국 쓰이지 못했다.

북한이 소련의 몰락 후 세계 질서에 편입되고자 시도한 건 이런 나름의 긴장을 반영한 행동이었다.

만약 북한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북한이 민둥산과 재래식 무기에 의존해 베트콩들이 했던 것처럼 십 수 년 간 미국을 전장에 붙잡아 두는 것은 힘들 것이다.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그건 북한의 전국토가 또 한 번 전쟁으로 유린되어야 가능한 얘기다. 북한 민중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대안인 것이다.

게다가 북한은 이미 “전 인민의 단결”, “전민 항쟁”을 말해왔고, 실제로 유사시 거의 모든 국민을 병력으로 동원할 수 있는 군 편제를 유지해 왔다. (여담이지만, 북한 정권은 각종 매체를 통해서 ‘전 조선 민족과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을 향해 ‘미제에 맞서라’는 선동도 해 왔다.)

지금 북한 민중이 원하는 것은 강력한 전쟁 방지책이다. 그들이 국가자본주의 국가의 일원이고, 아직 그 체제에 맞서 저항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의 의지를 지배계급 자체와 동일시하거나 아예 소거하는 것은 부당하다.

북한 지배계급에게 핵은 체제를 인정받은 후에도 영속적으로 보유해야 할 권력 수단이겠지만, 북한의 민중에게 핵은 자신들의 생존을 담보할 장치로 여겨질 수 있다.

물론 나는 핵무기가 제국주의를 패퇴시킬 수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전 세계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서만 타도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맞서는 세계적 저항을 북한 국가나 북한 민중이 건설할 수는 없다. 전자는 국가자본주의 국가이며, 후자는 적어도 지금으로선 세계로부터의 고립과 제국주의의 압박으로 인해 그런 국가에 의탁하고 있는 상황이다.

세계적 저항을 건설하는 것은 그러므로 우리의 몫이다. [아마도 장 동지는 내가 북한 국가와 북한 민중이 세계적 저항 운동을 건설하는 것이 어렵다고 쓴 것을, 저항 운동을 건설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한 것으로 이해한 것 같다.]

장 동지는 북한의 핵무장이 국제적 연대의 걸림돌이며, 동아시아 군비 경쟁을 낳을 수밖에 없다고 썼다. 우익적 관점과 패배주의적 관점이 뒤섞인 주장이다. 북한의 핵무장은 제국주의 군사력 증강의 결과물이지 원인이 아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질문에는 답이 없지만, 북핵이 먼저냐 제국주의의 군사적 압박이 먼저냐는 질문에는 명확한 답이 있다. 제국주의의 군사적 압박이 북핵을 낳은 것이다.

북한에게 핵이 없었을 때도, 북한이 각종 유화적 조처를 취할 때도, 제국주의의 군비와 군사적 압박은 증가해 왔다. 동북아에서 제국주의 세력이 군사력을 증강할지 여부는 북한의 핵 보유 여부에 달리 것이 아니라 반제국주의 운동이 얼마나 잘 건설되느냐에 달렸다.

장 동지와 같은 태도를 취한다면 기왕 북한이 핵을 개발했으니 그에 맞서 “방어” 수단을 증강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주장을 허용하게 된다.

졸지에 북한이 동북아 군사적 긴장의 주범이 되고, 제국주의 국가는 북한에게 끌려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건 정치적으로도 옳지 않고, 사실과도 맞지 않다.

북한이 노동자 국가이고, 핵 없이 세계 민중과의 유대 속에 아래로부터의 반제 투쟁을 벌이는 상황이라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공상적 바람일 뿐 현실이 아니다. 북한은 제국주의와 관련해서는 피억압 국가이지만, 동시에 국가자본주의 국가다.

북한이 핵개발에 성공했고 북한 민중이 그것을 용인한 상황에서, 우리는 북한의 핵이 제국주의 압박의 불가피한 결과물이라는 점을 강변해야 제국주의 국가의 민중을 설득할 수 있다.

“보라, 당신들의 지배자가 취하는 패권적, 제국주의적 압박이 평화는커녕 위기의 증가를 가져오고 있다. 머나먼 나라의 미개한 존재가 아니라, 당신들조차 그 위기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대중이 지닌 당장의 정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기초해서 선동을 해야 한다.

비단 위협이 아니라 실제로 베트콩과 탈레반의 총탄이, 팔레스타인 청년의 자살 폭탄이 제국주의 국가의 구성원들을 죽이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제국주의 국가의 민중을 향해서 선동할 수 있어야 하고, 선동해야 한다.

죽는 것은 각국의 피지배자들이요, 죽이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자들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해야 한다.

만약 북한의 핵이 제국주의 압박의 결과물이 아니라 단지 북한 지배계급의 이해로부터 비롯한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국제적 연대를 건설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면, 우리는 반제국주의 투쟁에 앞서 반북 투쟁에 먼저 나서야 한다. 모름지기 큰 적과 싸우려면 걸림돌부터 제거하는 것이 마땅한 순리 아닌가.

나는 모든 핵에 반대한다. 그러나 북핵 문제에 있어 반제국주의적 맥락 없이 ‘핵’에 대한 도덕적, 추상적 입장을 강조하는 것, 북한 민중은 소거한 채 북한의 핵을 그저 북한 지배계급의 이해만을 반영한 것으로 설정하는 것은 북한 핵과 제국주의와의 연결 고리를 약화시키며, 세계적 저항을 건설하는 데도, 그 저항의 승리를 통해 전 세계에서 핵을 소멸시키는 데도 이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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