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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을 추모하며:
하워드 진 ― 민중의 역사가

2009년 사형 반대 토론회에서 연설하는 하워드 진 ⓒ미국 〈소셜리스트 워커〉

활동가, 저술가이자 아마도 미국 좌파진영에서 가장 저명한 인사였던 하워드 진이 1월 27일 향년 87세로 타계했다.

하워드 진은 수십 년 동안 미국 사회에서 정의와 평등을 요구하는 무수히 많은 투쟁에 함께했다. 진은 오래 전 민권운동과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의 기록자이자 참가자였고, 그 때의 전투성을 80대까지 간직한 채 살았다.

그는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휴가를 즐기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러나 지인들은 그가 일주일 뒤 있을 강연을 고대했다고 말했다. 그의 다른 강연처럼 사람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하워드 진은 《미국 민중사》의 저자로 가장 유명하다. 이 책은 수백만 명에게 미국 사회의 알려지지 않은 투쟁, 저항과 반란의 역사를 알려줬다. 《미국 민중사》는 2백만 부가 넘게 팔렸고, 출판계에서는 해가 갈수록 더 많이 팔리는 독특한 책으로 유명했다.

2004년 하워드 진은 안소니 아르노브와 함께 《미국 민중사》의 자매편인 《미국 민중의 목소리》를 출간했다. 이 책에는 《미국 민중사》에 기록된 투쟁에 실제로 참가했던 사람들의 연설, 글, 에세이, 시와 노래 가사 들이 실려 있다.

그해 12월 《미국 민중의 목소리》는 2시간짜리 영화로 제작돼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됐고 수백만 명이 시청했다. 모건 프리먼, 맷 데이먼과 마리사 토메이 등 유명 배우들, 존 레전드와 브루스 스프링스틴 같은 유명 음악가, 스테이시 친 같은 유명 시인들이 이 영화에 출연했다.

이 외에도 하워드 진은 많은 책과 글을 발표했다. 1960년대 《베트남 ― 철군의 논리》에서 좀더 최근의 《테러리즘과 전쟁》까지 진의 글은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워드 진은 희곡작가로도 재능이 있어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에 관한 희곡인 《엠마》와 칼 마르크스에 관한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를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는 칼 마르크스를 현대의 뉴욕 소호에 부활시켜 오늘날에도 사회주의 사상이 유효함을 증명하려 했다.

노엄 촘스키는 〈보스턴 글로브〉가 인용한 문장에서 하워드 진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저작들은 한 세대의 의식을 바꿨고 우리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습니다.”

더 나은 세계를 위한 투쟁의 선구자

촘스키는 바로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행동이 요청될 때 사람들은 하워드 진이 행동의 모범이자 믿을 수 있는 인도자로 맨 앞에 나설 것이란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워드 진이 역사가로 가장 큰 명성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삶 자체도 그 자신이 기록한 투쟁에 참가한 사람들처럼 용기와 투쟁에 대한 헌신을 보여 줬다. 그는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투쟁에 참가하는 것을 자기 삶의 소명으로 여겼다.

하워드 진은 1922년 뉴욕 시에서 유대인 이주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학업을 마친 후에 그는 브룩클린 해군 조선소에서 일했는데, 이곳에 가자마자 기층 선동가가 됐다.

진은 제2차세계대전 중에 공군에 지원했고 폭격기를 탔다. 그가 참여한 1945년 작전은 역사상 최초로 네이팜 탄을 사용한 작전이었다. 이런 경험은 그가 수년 뒤 반전 활동에 참가하는 데 영향을 줬다. 그가 수많은 연설에서 반복해 지적했듯이, 파시즘을 물리치기 위한 ‘선한 전쟁’이라는 제2차세계대전의 명분은 무자비하게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미국 정부의 행동과 모순이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하워드 진은 군인장학금 덕분에 뉴욕대학교에 진학해 역사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1956년에는 애틀란타의 스펠만 대학 ―역사적으로 유명한 흑인 여성 대학 ― 교수로 채용됐다.

진과 부인 로슬린이 남부에 도착했을 때 민권 운동이 활발히 성장하고 있었다. 하워드 진은 그 투쟁을 목격했고 젊은 학생 활동가들의 고문 구실을 했다. 이 활동가들 중 일부는 나중에 학생비폭력위원회(SNCC)를 조직하는 데 주도적 구실을 했다. 진은 점거 시위와 행진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다.

스펠만 대학 학생들이 보수적인 대학 당국에 맞서 벌인 투쟁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교수 직위에서 해고됐고 이후 북부의 보스턴 대학에서 가르쳤다.

그는 이곳에서 초기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의 일부로 활약했다. 1968년 베트남 민족해방 투사들이 ‘텟 공세’를 시작하자 하워드 진은 다니엘 베리건 같은 다른 주도적 활동가와 함께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방문했다. 미국에서 하워드 진은 《펜타곤 페이퍼》의 출간을 도왔다. 이 책은 다니엘 앨스버그라는 군 내부 인사가 유출한 미국의 군사 계획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다. 사람들은 보스턴뿐 아니라 전국에서 벌어진 반전 시위의 연단에서 그의 마른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하워드 진은 평생 운동에 헌신하면서 미국이 중동에서 벌이는 전쟁에 반대했고 불의한 사법제도에 항의했고 노조 활동가들의 권리를 방어했고 정부가 벌이는 탄압의 희생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다양한 운동과 투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강연 요청을 아무런 불평 없이 수락했다.

역사를 만든 역사가

저항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그 기록을 학교 역사책에서 지우는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하워드 진이 한 활동은 매우 중요했다. 〈네이션〉 칼럼니스트이자 〈소셜리스트 워커〉 기고자인 데이브 지린은 하워드 진에게 바치는 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우리는 사실상 미국 역사를 다시 쓴 사람을 잃게 됐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만든 역사가를 잃었습니다.”

미국이 급진 정치와는 상관없다고 믿는 사람은 하워드 진 강연에 한 번도 참가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 때로는 온 가족이 용맹하고 재밌는 그 자신의 역사를 듣기 위해 그의 강연장을 가득 채웠다. 그는 미소를 띤 채 이렇게 말하곤 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대통령 자리를 점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를 점거하고 하고 있느냐입니다.” 사람들은 시민불복종을 촉구하는 이런 말을 듣고 폭소를 터뜨리며 박수를 쳤다. 하워드 진만이 이런 광경을 연출할 수 있었다. 그만큼 진실했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은 모든 미국 좌파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였다. 특히 우리가 힘든 투쟁을 벌이고 승전보가 드물었을 때 말이다. 진의 글은 우리에게 억압에 맞선 저항이 계속될 것이며 보통 사람의 투쟁이 세상을 바꿀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가르쳐 줬다.

그의 글은 또한 다른 것도 가르쳐 주었다. 높은 수준의 투쟁은 그전에 작은 투쟁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지금 개인들이 불의에 반대하고 미래를 위해 조직하는 것이다.

하워드 진의 자서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의 맨 마지막 말은 그의 훌륭한 삶에 바치는 최고의 찬사로 읽힐 수 있다.

“힘든 시기에 희망을 갖는 것은 단지 어리석을 정도로 낭만적이어서가 아니다. 인류의 역사 자체가 절망뿐 아니라 열정, 희생, 용기와 연대 정신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런 복잡한 역사에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이 달라질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오직 최악의 상황만을 본다면, 우리의 행동 의지는 꺾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민중이 용맹하게 행동했던 때와 장소를 기억한다면 ― 그런 경우는 무수히 많다 ― 우리는 행동하려는 에너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작더라도 우리가 행동한다면, 우리는 언젠가 찾아올 유토피아를 기다리며 가만 있을 필요가 없다. 미래는 무수히 많은 현재가 연결된 것이며 우리는 인간이 누려야 마땅하다고 믿는 삶을 위해 오늘을 살아야 한다. 우리 주변의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그런 삶을 사는 것 자체가 큰 승리가 아니겠는가.”

출처: 미국 반자본주의 주간지 〈소셜리스트 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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