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말하는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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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은 20년 넘게 노동운동에 헌신해 온 한진중공업 해고자다. 올 1월에도 김진숙 지도위원은 한진중공업 대량 해고 방침에 항의해 공장 앞에서 24일간 단식 농성을 한 바 있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연설과 글은 많은 노동자와 학생들에게 영감과 감동을 주는 걸로 유명하다. 《소금꽃나무》는 지금도 필독서로 꼽힌다.
이 글은 ‘다함께’가 주최한 2007년 ‘맑시즘’ 강연에서 김 지도위원이 한 연설을 글로 옮긴 것이다. 대부분 1980년대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에 관한 내용으로, 오늘날 경제 위기 고통전가에 맞서는 노동자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판단해 게재한다.(MP3 파일 다운로드)
저는 소개받은 대로 저 부산에 있는 한진중공업이라고 배 만드는 조선소의 용접공 출신입니다. 땜쟁이였어요. 그때 신문에도 나지 않았습니까? “대한민국 최초의 처녀 용접사 탄생”.
배 만드는 공장에들 안 댕겨 보셨지요? 배를 다 만들려면요, 보통 6개월에서 1년씩 걸립니다. 배 다 만들고 나면 진수식도 하고 명명식도 하고 행사를 거하게 해요. 그런 날은 선주도 오고, 선주 마누라도 오고, 국회의원도 오고, 교통부 장관도 오고, 경찰서장도 오고, 하여튼 할 일 없는 새끼들은 죄
제가 입사하고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제가 만든 배가 바다로 나가는 날이었습니다. 제가 만든 배가 바다로 나가는데 얼마나 기분이 째지겄어요? 11시에 행사를 한다고 해서 나는 10시 반부터 꽃단장을 하고 기다렸다. 그 배 내가 만들었잖아! 난 나를 데리러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임마들이요 10시 반쯤 되니까 데리러 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일하는 배에다 뻘건 줄을 쳐 놓고 아예 나오지 못하게 하더라고. 왜 나가지도 못하게 하느냐 그랬더니 직장이 “니 꼬라지를 한번 봐 봐라” 이라대? 내 꼬라지를 보니까 못 나가게 할 만하더라고요.
땜쟁이들 완전히 그지 새끼들 아닙니까. 오버헤드 천정 용접을 이렇게 하면은, 불똥이 떨어져서 들어갑니다. 용접하는 양반들은 체질이 특수해서 불똥 맞아도 안 뜨거운 줄들 아셔. 죄 뜨겁습니다. 떨어져서 들어가면 우선 멈추는 데가 허리띠잖아요. 막 털면은요, 그런 날은 목덜미부터 뒤꿈치까지 다 디는 거예요. 잘 때도 엎어져서 자야 되고 환장을 하겠더라고.
한 날은 내가 막 뛰는 걸 보더니 옆에 있던 아저씨가 “야, 뛰지 마라. 와 뛰노?” 이래요. 안 뛰고 가만히 있으니까, 신기하대. 고 자리만 폭 파이는 게 있잖아요. ‘야! 이것이 생활의 지혜구나.’
옷에 불똥이 떨어지면 불이 붙습니다. 지 몸땡아리에 불 붙은 거 모르는 놈도 있습니까? 근데도요, 땜쟁이들은 땜질하다가 용접봉 떼면 세상 끝나는 줄 압니다. 끝까지 가요. 나중에 용접봉 다 타면 그때서야 홀다
겨울엔 손 묶어 놓고 노나, 야들 잔치하는데? 야네들 1 도크에서 이렇게 행사하면요, 우리는 이렇게 2도크에서 내다 보면 야들 노는 거 다 뵌다. 배가 높잖아요. 저는 높이만 백 미터가 되는 배도 봤습니다. 그 높은 배에다 단을 이렇게 쌓아 가지고 거기에 누가 올라가냐면 꼭 선주 예편네가 올라간다. 그 예편네 그날 거기 올라가는 거 보면 눈꼴 셔서 못 봅니다. 그 배 지가 혼자 다 만든 거 같애요.
그 여자가 거길 올라가지고 그 큰 배에다 오색 테이프를 창창 감아서, 도끼로 테이프를 탕 치면, 그게 진짜로 금도끼랴, 비둘기들 후루룩 날아간다. 난 비둘기들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보는데요.
저는 넋을 빼고 그거를 쳐다보는데, 그 배가 세상에 태어나 첫 고동 소리를 뿌웅 내면서 바다로 가는 거예요. 뱃고동 소리가 들리니까 그 시끄럽던 아저씨들이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담배에 불을 붙여서는 철판 위에 올려놓습디다. 그리고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 “진숙아, 윤식이 나간다.” 이래요. 그 배 만들 때 죽은 노동자 이름이 윤식이었드랬습니다. 그때부터 고동 소리가 들리면 아! 저 배 만들 때 누가 죽었지, 누구 손가락이 잘렸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데요.
세상 모든 걸 만들어 낸 건 노동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만들어 낸 걸 움직이는 것 또한 노동자들이에요. 우리는 그런 걸 별로 의식 못하고 삽니다만, 여러분이 입고 있는 옷도 노동자들이 만들었지요. 이 책걸상도 다 노동자들이 만들었고, 볼펜도 노동자들이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노동의 결과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노동자들 얘기를 하려고 저는 쌔가 빠지게 부산에서 왔는데요.
그런 노동자들이 어떤 취급들을 받고 살았냐면요. 5천 명이 일하는 공장에 식당이 없었다니까! 그래가 도시락을 줘요. 그것도 우리가 돈 내고 사 먹는다. 근데 이 눔의 도시락 공장이 다대포에 있는 거예요.
새까만 깡보리 밥이었드랬습니다. 저는 징역에 들어가 밥을 먹는데요. 밥이 진짜 백옥 같더라니까? 밥이 어찌 좋았는지, 징역에서 나가라고 하는데 안 나가고 개긴 건 제가 유일하다고 그랬습니다. 한 번은 도시락을 받았는데 까만 게 콩처럼 섞여 있더라고. 뭐였는지 아세요? 쥐똥이었다니까, 쥐똥! 손톱 깎은 게 열 개가 고스란히 나온 적도 있고요.
그때는 식수도 없었어요. 물을 어떻게 먹냐 하면, 물차가 와요. 바퀴 달린 차가 오거든. 여름에도 펄펄 끓는 물이 옵니다. 그런데 한번은. 물차 꼭지를 틀었는데, 물이 안 나오는 겨. 아저씨 하나가 올라 가서 물차 뚜껑을 열었는데, “야! 왕건이가 걸렸다” 이러더라고. 쥐 하나가 불어터져가지고 이따만 한 게 그 물차 구멍을 막고 있드랬습니다. 아저씨들 그거 건져 내고, 고기 우려낸 물이라고, 그러고 먹었드랬습니다.
여러분 탄압이 있으면 어디든 저항이 있습니다. 그러고 터져 나온 게 87년 7월, 우리가 7·8·9 대투쟁이라고 얘기하는데, 여기 87년생도 있다메요?
87년 7월 투쟁이, 한진중공업에서는 7월 25일에 일어났어요. 그때는 파업 같은 개념도 없었어요. 저는 그때 해고된 상태였고. 한진중공업에 ― 그때는 대한조선공사였습니다 ― 가니까 길이 막혔더라고. 그때는요, 중공업 노동자들은 파업하면 길부터 막고 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건 아니야. 근데 어쨌든 본능적으로 길부터 막고 했드랬습니다. 제가 도착하니까, 택시를 잡아 가지고, 그걸 무대로 만들어 놨어요.
그때 조합원이 3천 명이었어요. 3천 명이 화이바
그때는 노동가요 자체가 아예 없었을 때였어요. 유일하게 ‘늙은 노동자의 노래’라는 게 있었거든요. 그때 지오세
저는 그 시절만 생각하면 지금도 뼈저리게 후회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때 활동가라는 사람들이 골방에서 학습을 하는데 주로 어디 책들을 가지고 했냐면, 그때는 한국에는 노동조합에 대한 책도 없었어요. 일본 책들을 가지고 학습들을 했다니까. 일본이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노동조합의 형태가 어떻습니까? 기업별 체제에요. 우리는 노동조합은 기업별만 있는 줄 알았대니까? 현대자동차 따로, 한진중공업 따로, 대우조선 따로 이렇게 있는 줄 알았어요. 무식하게 진짜 노동조합을 다 따로따로 만든 겨. 위원장도 따로 만들고 간부도 따로 만들고. 그때 우리가 일본 책이 아니라 다른 나라 책들을 가지고 했으면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운명이 달라졌을 겁니다. 부산에 그냥 노동조합 하나 만들고 아니면 전국적으로 노동조합 하나 만들어서 가입만 시키면 되는 거 아니에요, 오는 족족 다! 근데 그 따우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니까? 그래가 7·8·9 대투쟁이 끝나고 나서 부산에서 그 투쟁에 함께한 노동조합이 수십 개, 아니 수백 개 아닙니까.
부산대학교에서, 그때는 노동자들이 모일 때도 없드랬어요, 유일하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대학교였다고. 부산대학교 운동장에서 3만 명이 모인 거예요. 노동자라는 이름을 걸고 집회를 하는데 아, 진짜 많더마. 우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진짜 그때는요, 집회 한 번 하면 진짜 진심으로 했습니다. 팔이 막 다 뻐근하고 이랬는데, 구호를 외쳐도 막 이렇게 외쳤거든.
근데 그때는 노동가요 자체가 아예 없을 때였으니까. ‘늙은 노동자의 노래’ 아홉 번, 열 번을 해야 집회가 끝나는 거여. 근데 거기 집회에 한진중공업만 앉아 있는 게 아니고, 요 옆엔 대우정밀도 있고, 요 옆엔 신동금속도 있는데 그 노래 부를 때마다 우리는 다 불렀는데 그 새끼들은 아직도 부르고 앉아 있거든.
그래 그게 7월 25일 토요일이었을 거예요, 제 기억에는. 26일 새벽 일요일에 공권력이 투입 됐는데 야네들이 길을 철판으로 막아 놓으니까 길로 못 들어오고 배 타고 들어왔다. 여러분들 공권력이 노 저어서 투입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제가 맨 마지막에 나가면서 다 집에 보내고 갔는데 58명이 연행이 됐다는 거예요. “야, 이거 연행될 리가 없다. 내가 맨 마지막에 갔는데.”그래가 경찰에서 일부러 우리를 교란시킬라구 인제 불안하게 만들라구 일부러 공갈치는 거다 이랬다. 근데 마누라들이 58명이 왔더라구. 지네 아저씨가 집에를 안 온댜. 그땐 휴대폰이라는 것도 없을 때니까, 기자들한테 확인하는데 58명이 연행된 게 진짜 맞더라고요. 이 사람들이 어디 있었냐 하면, 그때 한진중공업이 10층 짜리 신관 건물을 막 새로 지었습니다. 거 우리가 만들었다. 근데 치사 빤스 같은 새끼들이 우리를 거길 못 들어가게 했다니까. 그 외국의 선주들도 막 오고 이러는데 아까 얘기한대로 그지들이 돌아다니면 회사 이미지에 타격 갈까봐 거길 못 들어가게 했어요, 진짜루. 이런 얘기 지금 하면 안 믿습니다. 87년 생들은 아마 실감을 못할 거예요.
거길 못 들어가게 하는데 파업 때가 되니까 완전히 해방구 아닙니까, 다 우리 꺼거든. 거기를 들어가 있었는데 이 58명이 어디 한 군데라도 모여 있으면은 좋잖아. 전부 술들이 떡이 돼 가지고. 그 10층짜리 신관 건물에는 사장실, 부사장실, 이사실 이런 데가 있습니다. 거기를 하나씩 들어가서 안에서 문들을 또 죄 잠가 가지고요. 유치장에 연행이 돼서 보니까 저거들이
연행이 됐으니까 그 사람들부터 끄내 와야 될 거 아닙니까. 그래 이제 월요일 날이 딱 밝았는데, 저는 일요일 날 새벽에 공권력이 투입된 이후부터 아저씨들 집집마다 찾아 다니는 거예요. 휴대폰도 없고 삐삐도 없을 때니까 아저씨를 만날래면 집으로 가는 것밖엔 방법이 없드랬습니다. 아저씨들 그때 영도에 많이 모여 살았을 때였어요. 집집마다 아저씨들을 찾아 다닐때 영도 골목마다 제 사진하고 현상금 50만 원이 붙어 있었습니다. 제가 월급이 13만 원이던 시절에.
아저씨들 찾아다니면서 이제 술 먹고 파업하면 클 난다. 조직적으로 하지 않으면 다 깨진다. 아저씨는 1조에 들어가서 물자 보급 책임지고, 아저씨는 2조에 들어가서 정문 경비 책임지고, 아저씨는 3조에 들어가서 서문 경비 책임지고 …
그래 월요일 날이 딱 밝았는데 공장에 들어가야 재파업이 될 거 아닙니까? 근데 공장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여. 세상에 전국에 있는 백골단들은 글루 다 온 거 같더라고, 하여튼. 그 넓은 공장을 서너 겹 둘러싸 가지고요 개미 새끼 한 마리 들어갈 수 없는 거야. 산복도로 위에서 막 우왕좌왕 하고 있으니까 아저씨 하나가 “야, 진숙아, 일루 와 보래이” 이래. 가니까 저 봉학국민학교 밑으로 가면 하수구 구멍이 있는데 글루 들어가면 2도크가 나온댄다. “아저씨 그거 어떻게 아세요?” 그랬더니, 독수리 훈련할 때 글루 들어간댜.
독수리 훈련 안 해 보셨지요? 그거 애들 다방구 게임하고 똑같다. 저도 같이 일하던 아저씨가 자기 철야 하고 와서 피곤하다고 예비군 훈련을 나보고 가라구 그래서 예비군 훈련을 간 적이 있어요.
그래가 3천 명이 몇 시간 걸려 가지고 하수구 구멍으로 들어가니까 진짜 2도크가 나오는 거예요. 3천 명이, 아! 그땐 한 줄 빼먹은 걸 몰랐으니까, 그 ‘늙은 노동자의 노래’를 어찌 비장하게 불렀는지요. 아저씨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그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까 바깥에서는 난리가 난 거예요. 저 새끼들이 어디로 들어갔냐 이거예요. 몇 중대가 뚫렸냐는 거지. 저들끼리 조인트 까고, 걔들은 지금도 모릅니다, 몇 중대가 뚫렸는지.
그래가 3천 명이 재파업에 들어가는데 제일 먼저 뭐부터 해야 되겠습니까? 58명부터 끄내 와야 되잖아. 지금이야 노동자들이요 누가 구속됐다 그래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세상에 도달해 있습니다. 그때만 하더래두요, 울산에서 누가 연행됐다 그래도, 창원에서 누가 연행됐다 그래도, 울산에서, 그때는 쟁의행위 찬반투표가 어딨습니까. 바로 기계 내리고 가면 되는 거예요. 그때 실제로 마창노련 의장이 구속돼 있을 때는 창원 시가지가 막 만들어질 때에요. 콜타르 있잖아. 그 드럼통을 굴리면 왕대자 화염병이 된다.
그때는 하여튼 58명이, 그 사람들부터 끄내 와야 하니까 3천 명이 다시 모여 가지고 재파업에 이렇게 들어가는데, 저는 군대는 안 갔다 왔습니다.
어용 노조 집행부는 다 도망가 버리고 지도부가 “이제 58명 구출하러 영도경찰서 진격 투쟁 갈 거니까 완전 무장하고 집결하십시오” 이렇게 한 거예요. 근데 땜쟁이들은 일하던 채로 나가면 완전 무장 아닙니까. 화이바 쓰고 시커먼 안경 쓰고 마스크 시커먼 거 쓰고, 안전화 안에다가 작업복 딱 말아 넣고. 야! 3천 명이 빠이프
그래 3천 명이 모인 겁니다. 그래가 “문 열어!” 이래가 정문이 쫘악 열린 거예요. 백골단들하고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딱 대치한 겁니다. 얼마나 긴장되는 순간입니까. 숨소리 하나 안 들리지, 차는 안 다니고…. 그런 상황이 되면요 제가 겪어 본 남자들의 세계는 웃통 벗는 사람이 꼭 하나 나온다.
근데 안 비키잖아. 근데 남자들이 진짜 웃기는 게요, 아니 그때까지도 개목걸이를 왜 걸고 댕기냐?
그렇게 우리도 준비가 하나두 안 된 투쟁이랬드랬어요, 그게. 그러는 찰나에 뭔가가 백골단들 방패에 가서 팍! 맞는데, 이게 떨어지는 게 아니라 꽂히는 거에요. 저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전경들 방패가 쇠로 돼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근데 이게 반이 쫙 나가기도 하드라고요. 그때 영도경찰서장이 그걸 맞아가지고, 여기, 여기, 하필 여기가 날라가 가지고 피투성이가 돼서 실려 갔거든요. 이게 화염병이나 돌멩이 같으면 맞고 떨어지는데 가서 박히는 거예요. 저쪽 대오 끝에서 그게 날라 가더라고. 그쪽 찾아가서 보니까 세상에! 조선소에는 굴러다니는 게 철판 쪼가리 아닙니까. 그거를요, 별표로 다 오렸다. 그래 가지고 끄트머리를요 구라인다
그걸 집어던지고 싸움을 하니 게임이 됩니까? 저절로 길이 뚫린 거예요. 그래가 영도경찰서까지 가는데 한진중공업에서 영도경찰서까지 그래도 꽤 갑니다. 꽤 가는데 앞 대가리는 경찰서에 도착했는데 아직 뒷 대가리는 공장에서 출발도 못했습니다. 사람이 어찌나 많았는지 하여튼. 우리 조합원들뿐 아니라 막 아새끼들, 마누라들, 개새끼들 하여튼 다 나온 거예요.
그래가 이 사람들 완전히 이긴 거 아닙니까. 공권력하고 싸워서 이겼는데. 그니까 이 아저씨들이 들어와 가지고 파업에 들어갔는데, 그때 이미 게임은 끝난 거지요. 그니까 회사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파업을 탄압할라구. 얘네들이요, 얼마나 치사한 새끼들이냐면요, 얘네들이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건 뭐 정해져 있습니다. 전기 끊고 물 끊고 밥 끊고. 얘네도
진짜 그땐 해방구라는 것을 실감을 했드랬어요. 노동자들이 그렇게 투쟁을 하면서 야, 이게 뭔가 하니까 된다는, 그리고 우리가 일을 안 하니까 그야말로 공장이 멈춘다는 걸 실감을 했습니다. 그때 서른세 가지 요구 조건 중에 서른두 가지가 관철이 됐어요. 임금도 25프로
여러분 우리가 민주노조, 민주노조 네 글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지만 민주노조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를 해요, 왜 노조 하나에 저렇게 무모하게 목숨을 거는가? 그런 경험들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 보지 않았고 그 뜨거운 경험들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게 다만 책에만 나오는 얘기일 수 있겠는데요,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포기할 수 없는 건 그게 아니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가 투쟁들을 하는데, 노동조합이 어느 정도 민주화됐습니다. 그 이후에 한진중공업은 거의 해마다 파업을 했드랬어요. 이긴 싸움도 있지만 물론 패배한 싸움이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투쟁을 포기할 수 없었던 건 그건 존재의 확인이었어요. 그렇게 하면서 나도 노동자라는, 나도 인간이라는 선언을 비로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노동자들이 신나는 봄날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자본가들이 인제 노동자들하고 저 같은 사람하고 분리하는 방법이요, 여러분이 ‘자
제가 노무현 씨하고 인연이 어떻게 되냐면요, 사람들은 노무현이가 ‘왼쪽 깜빡이 키고 오른쪽으로 갔다’ 그러지만 뒤로 갔어요.
그러는데 부산민주시민협의회라는, 부민협이라는 단체가, 유일한 재야 단체가 있드랬어요. 거기 상임이사가 노무현이었거든. 근데 부민협에 가면 전동 타자기가 있댜. 전동 타자기로 치면 이걸 안 긁어도 되니까 공정이 반이 줄어들거든요. 그때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유인물을 뿌리던 시절이니까. 그렇게 뿌리기가 힘들었는데도. 그래서 부민협이라는 데를 갔다. 근데 내가 몽타주에 오려 들고 다니던 이호철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지금 민정비서관으로 가 있습니다. 부민협에 가 가지고 이만이만해서 왔다고 그랬더니, 아 잘 오셨다고 인사를 하는데 “이호철입니다” 이러는 거예요. ‘어 어디서 많이 본 놈인데?’
이 부민협에서 그렇게 인쇄를 하고 등사를 해 가지고 현장에 뿌리고 이랬드랬는데요. 그때는 노동자들이 무슨 단결이라는 말을 알았습니까, 투쟁이라는 말을 알았드랬습니까. 저도 전혀 노동조합에 대해서 모를 땐데 제가 노동조합 대의원에 출마하면서 해고됐습니다. 그게 어떻게 됐드랬냐면, 그때만 하더라도 위원장 간선제라고 말씀드렸지요. 86년이 위원장 선거가 있던 해에요. 그니까 대의원 88명이 모여 가지고 위원장 선출을 합니다. 위원장 선거가 있는 해니까 이 해의 대의원 선거는 치열하겠지요. 그때는요, 위원장 출마를 하면 뭐 정책이나 공약이나 이런 걸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기순이파는 부곡온천 가고 상주파는 도곡온천 가고 종래파는 제주도 갔다 왔댜” 그러면 “이번에 종래가 먹었네?” 이러던 시절이거든요. 아저씨들이 아무도 노조 얘기하는 사람 없었어요.
저는 진짜 황당했던 게 땡끄라는 데가 있거든요. 조선소는 땡끄로 만들어졌는데 배를 이렇게 반으로 쫙 짜개면요, 단면이 이렇게 생겼습니다.
제가 스물한 살 때 조선소에 입사해서 진짜 끔찍한 죽음들을 마이 봤는데요. 그 철판 밑에 끼우는 게 있습니다. 딱 도끼날이에요. 이게 날라와서 반으로 딱 쪼갠 것도 봤어요. 한번은 크레인 신호사 아저씨가 철판을 뺐는데 이 날라가던 철판이 걸려 가지고 아저씨를 치고 지나간 거에요. 옆에 있던 사람들이 쫓아 가서 바지를 벗겼는데 아랫도리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때까지도 그 아저씨가 눈을 뜨고서 저를 쳐다봤는데 그 눈빛이 어땠을 거 같습니까? 그 눈빛을 기억하는 자의 이후 삶이 어떨 거 같아요? 제일 끔찍한 죽음이 감전사고로 죽는 시신이었습니다. 혈관이 다 터져 죽어요. 눈알까지 빠진 것도 봤습니다. 제일 어이없이 죽은 사람이 땡끄 안에 들어갔다가 나올 길을 못 찾아서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데가 땡끕니다. 처음에 입사해 가지고, 땡끄가 아마 수십 미터에요, 진짜로. 근데 조선소는 사다리가 이렇게 된 게 하나도 없거든요. 전부 직각입니다. 이거를 타고 아저씨들이 담배 시간이 되니까 전부 갑판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땡끄 안에 들어가면 자기 손끝이 잘 안 보입니다. 그러니까 눈 앞에 뻔히 맨홀, 우리는 하치카바 구멍이라고 부르는데 하치카바 구멍이 뚫려 있는 걸 알면서도 거길 빠져요. 한번은 그 땡끄 안에 들어갔는데 옆에서 구라인더 하는 아저씨가 없어진 거예요. 근데 땡끄 안에 들어가면 잘 나오지도 못하거든요. 용접을 한참 하고 나니까 사람이 없어졌어요.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화이바가 뒤집힌 채 그 구멍 우
이 땡끄 안에 들어갔다가 담배 시간 10분이라도 그거이 좋은 공기 마실라고 전부 아저씨들이 그 사다리 하나에 매달려서 갑판으로 다 기어올라 가는데 저도 뭣 모르고 막 따라갔어요. 거기 있으면 막 터질 것 같더라고. 막 따라갔는데 갑판 구멍이 요만하거든요, 사람 하나 겨우 겨우 드나 들만 해요. 갑판에다가 머리를 쏙 내밀었는데, 빼도 박도 못 한다는 얘기가 뭔지 실감이 나는 게, 내려갈라 그러니까 그 사다리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내가 내려가면 다 내려가야 될 거 아니에요. 그 밑에서는 빨리 올라가라고 난리가 났는데 올라갈 수가 없는 거예요.
아저씨들이 담배 시간에 바다를 향해서 쫙 서 가지고 뭐 하냐면 누구 오줌발이 멀리 나가는지 시합하고 있다.
근데 86년에 위원장 선거가 있을 때니까 아저씨들이 노조 얘기를 하시더라고. 제가 지나가니까 “야, 진숙이 니는 처자식도 없으니까 니가 대의원 한번 나가 봐라”이러는 거예요. 전 노조가 뭔지도 모르는데. 아저씨들이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뜻이 정 그러면 한번 해 보겠습니다” 이랬어요.
사람이 또 워낙 못 하게 하면 더 하고 싶습니다. 그게 뭔지도 잘 모르면서 하여튼 못 하게 하니까 꼭 해야 될 것 같은 거여. 몇 번을 가서 서명용지를 달라고 하니까 왜 꼭 할라구 그러느냐고 그러더라고. 그래 제가 점을 보니까 명이 짧다고 그러더라고,
몇 번을 가니까 한 날은 과장이 부르는 거예요. 과장이 불러가지고 사무실엘 들어가니까 관리자들 쫙 앉아 있고 과장이 앞에 앉아 있는데, “진숙이 왔습니다” 이랬더니 과장이 묻드라고요. “니 뭣 땜에 대의원 나올라 하나?” 지금 같으면 그게 부당노동행위인데 그런 걸 전혀 몰랐으니까.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전 딱 맞다고 생각하는 게 거기다 대고 내가 뭐라고 그랬냐면, “전 우리 회사의 어용 노조를 뿌리 뽑고 민주노조를 쟁취하기 위해서 출마했습니다.”
그때가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그런데 그런 걸 몰랐어요. 전두환이 진짜 정의로운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어디든 가면 전부 정의 사회 구현이었드랬잖아요. 그렇게 딱 얘기를 하고 나니까 관리자들이 일제히 저를 쳐다보는데요, 아, 저는 태어나서 그런 눈빛을 처음 받아 봤습니다. 지리산 천왕봉 일출이 그거보다 자글거리겠습니까?
그때부터 회사 분위기가 막 이상해지더라고. 막 일도 안 시키고요, 회사 생기고 나서 사십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사장님께서 노동자들 수천 명을 모아 놓고 교육을 하는 거예요. 사장님 특강의 제목이 뭐였는지 아세요? ‘베트남 공산화의 실체’였다.
사장이 첫 마디가 큰일 났다 이거야. 우리 회사에 도산 세력이 들어왔다는 거야. 근데 그때는 민주노총도 없고 막 이런 거 없을 때거든요. ‘다함께’도 없고.
근데 그때는 그런 얘기가 통했어요. 뭐 빨갱이, 위장취업자, 이러면 아무도 옆에 안 오던 시절이거든요. 그래가 베트남이 공산화된 얘기를 막 하는 거예요. 그러드니요, 결론이 뭐였냐면요, 베트남 공산화에 진숙이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단다?
나는 진짜 쪽 팔리는 게요, 그때 베트남이 어떻게 된 맥락인지를 몰랐어요. 베트남의 남과 북 민중이 미국과 맨주먹으로 18년을 싸워서 이른바 해방을 쟁취해 냈다는 얘기를 한참 이후에 리영희 선생님의 책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때 얘기를 들으면서는요, 베트남의 어떤 회사에서 하룻동안 데모한 줄 알았어.
그런 얘기를 사장이 막 하는 거예요. 막 일도 안 시키고요, 한 날은 웬 낯선 놈들이 와 가 사진을 찍어 가더라고. 난 언론사에서 인터뷰하려고 온 줄 알았다. 내가 드디어 뜨나 보다 이랬는디요, 걔네들이 누구였냐면, 우리 회사가 배만 만든 게 아니라 탱크도 만들고 군함도 만들었습니다. 각급 방위산업체였어요. 보안사 새끼들이 상주를 하고 있드랬는데 걔들이 걔들이었던 거여. 내가, 말을 안 하고 상주를 하니 내가 아나, 걔들을?
한 날은 일하는데 나오라는 거여. 나가니까 왠 떡대 같은 놈들이 지키고 있다가 시커먼 보재기를 확 덮어씌우더라고. 그러더니 양 옆에서 이렇게 잡아가지고 어딘가를 끌고 가는 거예요. 난 얼루 가는지도 몰랐드랬지. 얼만큼 차를 달려서 멈추고 내리고, 뭐 ‘충성’ 이런 소리가 나고 철문이 ‘쩡’ 하고 열리고요. 지하로 내려갔어요. 그 어느 방에 문이 열려서 그 안에 들어가는데 보재기를 벳기고 보니까, 상상이 되십니까? 방이 다 빨간 방이었습니다. 벽도 빨갛고 욕조도 빨갛고 세면기도 빨갛고 바닥도 빨갛고요. 방 가운데에는 버얼건 밧줄이 내려 와 있어요.
옷을 벳기고 군복을 갈아 입혀요. 신발을 벳기고 고무신을 갈아 신깁니다. 얘네들이 실실 웃으면서 하는 얘기가 왜 옷을 갈아 입히는지 아녜. 그게 첫 질문이었습니다. 내가 알 게 뭐예요.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그래가 쫄아 있으니까 알몸으로 작업을 하면 자못 기분은 좋은데 살점이 묻어난답니다. 그리고 맞았습니다. 그 상황이 어떤지는 각자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패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야네들이 또 다 나가요.
그러고 나면 인상 좋은 놈이 하나 들어 온다. 그래가 나보다 더 흥분을 해요. “오, 연약한 여자를 누가 이렇게 때렸어? 야이 나쁜 새끼들!” 그리고 막 “커피 한 잔 할래?” 이러고요, 그리고 귀에다 대고 이 방에 도청장치 돼 있으니까 내 말 잘 들으랴. 저 새끼들이 인간도 아니래요. 너를 죽여서 어디다 버린다는 것까지 다 짜 놨대. 얼마 전 송도 앞바다에서 대학생 시체 떠오른 것도 저 새끼들이 한 짓이랍니다. 실지로 제가 거기 가기 한 달 전에 송도 앞바다에 대학생 시체가 떠올랐어요. 근데 허리에 시멘트 덩어리가 매달려 있드랬습니다. 근데 그게 지금도 의문사에요. 자살로 돼 있습니다, 그 죽음이. 이런 시대가 멀지 않은 과거에 우리들한테는 있드랬는데요.
그런 얘기를 막 하면서 너 같은 여동생이 있어서 하는 소리래요. 너를 꼭 살리고 싶다 이거야. 자기한테 협조를 해 줘야 나를 살릴 수 있대는 겁니다. 내가 너한테 이런 얘기를 하면 자기도 무사하질 못하대요. 그건 너하고 나만의 비밀이랜다. 손가락 걸고 얘기하고. 저는 걔가 진짜 내 편인 줄 알았드랬습니다.
그래가 걔가 또 나가요. 그러고 나면 여덟 명, 아홉 명이 또 들어와 가지고 막 그 작업을 또 합니다. 이거를 몣 번을 반복하면요, 나중엔 걔가 기다려져요. 그리고 간첩이 안 될 재간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생산되는 간첩은 1백 프로 메이드 인 대공분실이라고 확신을 합니다.
그걸 몣 번을 하면서 낯선 놈 사진을 봬 준다. 근데 나는 얘를 모르면 죽는 거여. 그걸 몣 번을 하면 아는 놈이 된대니까? 근데 문제는 알리바이가 안 나오는 겁니다. 그래가 그걸 몣 번을 하다가 나중에는 거꾸로 매달아 놓습니다. 밧줄이 그런 데 쓰는 거예요.
나중에는 제가 입고 갔던 옷을 던져 줍니다. 옷을 보고 눈물 흘려 본 적 있으십니까? 옷을 보는 순간에 이거 살아서 집에 간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습니다. 지네들 말대로 돌맹이 매달아서 송도 앞바다에다 던질 거 같으면 알몸인 제가 훨씬 낫지요? 근데 옷을 갈아 입으라는 거여. 옷을 벗는데 군복이 안 벳겨졌드랬습니다. 여기다 대고 얘네들이 또 안티프라민 발라 준다. 터진 상처에 안티프라민 안 발라 보신 분들, 꼭들 한번 발라 보셔. 맞을 때보다 더 아픕니다. 그리고 멍든 데 쇠고기 갈아서 붙이면 된다는 분들 진짜 고마운 분들이시지요? 전 그분들의 은혜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가 처음에는 살아서 나왔으요. 나왔는데, 그런 데 갔다 와 미치는 사람들 얘기가 요즘은 더러 한번씩 나옵니다. 테레비에도 나와요.
진짜 미치겠더라고요. 잘라고 이렇게 누우면 형광등 끈이 밧줄로 뵙니다. 길거리 다니는 사람들은 전부 그 새끼들로 보이는 겁니다. 시내버스를 타면 기사 아저씨가 백미러로 쳐다보는데 그 새끼인 겁니다. 정거장도 아닌데 내려서 막 도망가면 세상 사람들이 전부 나를 잡으러 쫓아오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열흘쯤 지났는데 또 왔어요, 그놈아들이. 두 번째 감방은 다 노란 방이었드랬습니다. 두 번째 왔다는 거는 이미 내 발로 못 걸어 나간다는 거 아닙니까? 글마들 손에 맞아 죽던지 아님 간첩이 되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 없드랬어요. 그래가 그 고통을 당하고 죽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자 그래가지고 옷 갈아 입힌다고 이러는 순간에 저 벽 끝에 가서 벽을 꽝 박았으요. 근데 여러분 참고하세요. 대공분실의 벽은 방음장치 때문에 스티로폴로 돼 있다.
그러고 나니께 더 고통스러운 게 화장실에 갈 때도 볼일 볼 때 문 열어 놓고 봐야 되는 겁니다. 걔네들 지키고 있는데. 얘네들은요, 지네들이 그렇게 하다가 죽는 거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목숨 끊는 건 용납을 안 하는 족속들입니다.
그래가 그 대공분실이라는 데를 세 번을 갔드랬습니다. 나중에는 돈이 3천만 원이래요. 얘네들이요, 첫 번째 대공분실에서 나올 때 뭐라고 상부에 보고했는지 아십니까? 자생적 공산주의자였다? 그때는 그런 공산주의자도 있드랬습니다. 3천만 원을, 포장도 안 한 돈을 책상 위에 쌓아 놨습니다. 그리고 얘네들이 하는 얘기가 사표를 쓰면 이 돈을 준대요. 그리고 이 사실은 아무도 모른답니다.
결국에 얘네들이 요구하는 게 이거였구나! 내가 몟 달을 그렇게 고통받았던 게 결국 결론이 이거였다고 생각하니까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여러분들 피가 거꾸로 솟아보셨습니까? 진짜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드랬어요. 그래가 책상을 뽑아서 얘네들한테 확 엎을라 그랬거든요. 참고하세요. 대공분실의 책상은 안 뽑힙니다.
그랬드랬는데요. 막 회사에서 사장이 직접 뭐 베트남 공산화에 대한 실체 특강을 할 때, 그 와중에 제가 대의원에 출마를 해서 난생 처음으로 일등을 해봤드랬습니다. 일등으로 대의원에 당선이 됐드랬다, 가문의 영광 아닙니까? 그래 막 대의원대회를 갔는데요, 그때 대의원 88명이 전부 완장들만 앉아 있어. 다 관리자들이 대의원이었습니다. 걔네들이 결산 보고서를 보고 있는데 나만 안 주더라고? 왜 안 주냐고 그러니까 인쇄를 87부밖에 안 했댜. 그래가 옆에 아
그리고 어용 노조가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권한들이 굉장히 강했드랬습니다. 조합원들 화이바나 그런 것도요, 회사 돈 받아서 노조에서 이걸 다 구입하게 돼 있더라니까? 화이바하고 안전화 이런 거를? 근데 화이바도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한방 맞으면 그대로 꽂히는 거야, 다! 안전화도요, 앞에 그게 쇠로 돼 있거든요? 워낙 철판에 이렇게 발가락 잘리는 사고가 많으니까, 앞에 쇠로 돼 가지고 발가락 잘라지지 말라고 그렇게 돼 있거든. 그런데 이 놈의 안전화가 죄 불량이 돼 가지고 철판에 부딪히기만 해도 쇠가 안에서 우그러지니까 그것 때문에 발가락이 찢어지고 그랬습니다.
그런 걸 조합원들이 신으라고 노조에서 사 주고 이랬대니까요? 조합원들이 다치면 노조에서 위로금을 주게 돼 있는데, 2만 원 씩. 저도 몣번을 다쳤드랬어요. 손바닥에 지금 찢어진 상처 그대로 있습니다. 철판에 찢겨서 거의 맞짱을 떴드랬지요. 이 벽 한 몇 개만한 철판이 넘어져 가지고 두 다리 다 부러져서요, 병원에 육개월 동안 입원해 있고 이랬거든요. 근데 노조에서 위로금을 주게 돼 있는데 나도 여섯 번을 다쳤는데 그거를 한번도 몰랐거든요. 근데 여섯 번이 도장이 다 찍혀 있는 거여, 내 도장이. 게 보니까 딴 아저씨들 아무도 몰라 이거를. 그 전에 대의원 하던 새끼들이 다 해 먹은 거야.
대의원들 찾아다니면서, 내 돈 내놓으라고 했더니 나중에 이 새끼들 출근을 안 하더라고. 거 어떻게 햐. 집으로 가야지.
그래가 인제 대자보를 쓰자는 생각이 들대. 근데 그때는 지금처럼 대자보 쓴 거를 본 적도 없고 써 본 적도 없으요. 그래 달력을 찢어 가지고 달력 뒤에 "내 돈 내놔라, 이 도둑놈아" 이래가 그 집 대문에다 붙여 놓고 앉아 있으니까, 빚쟁인 줄 알았는지, 그 동네 가게 아줌마가 지네 집 외상값도 받아 달라는 거여.
그래가 이것도 아니다 싶어 가지고 뭔가 뽀다구 나게 할 만한 걸 막 찾으니까 머리띠를 매자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근데 지금처럼 뻘건 머리띠 이런 게 없을 때거든요. 집에 와서 머리띠 할 만한 걸 막 찾으니까 압박붕대가 나오대? 이거 땜쟁이들 집에 압박붕대 하나씩은 다 있거든요. 언제 뿌러질 지 모르니까. 압박붕대가 머리띠 매면 환상이다. 폭도 딱 맞죠, 약간 쪼여 주는 느낌도 들지. 그래가 매직을 세 가지를 산 거여. 까만 거, 빨간 거, 파란 거. 양 옆에 단결이라고 시커멓게 쓰고 혼자 하메 뭔 단결입니까?
가운데다가 태극마크까지 그렸어요.
그래 이게 왜 단결이 안 되나 이래가, 회사에 가 유리 앞에 비춰 보니까 웬 걸 압박붕대가 단점이 매번 찍 늘어납니다. ‘ㄷ’은 여기 가서 붙어 있고, ‘ㄹ’은 여기 가서 붙어 있더라고요.
그래가 그 다음 날엔 빨간 걸로 눌러서, 어째 내내 눌러 썼는지, 풀렀는데도 일주일 동안 이마배기에 단결이었습니다. 빨간 걸로 쓰고 가니까 회사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봐라 진숙이, 뺄갱이니까 뺄갠 걸 좋아 한댜?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야, 이 새끼들아 그럼 불조심은 왜 빨간 걸로 쓰냐?"
그런 와중에 이제 대의원에 출마를 해서 걔네들 집 앞에 가서,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게 철야 농성이야. 그때는 그것도 몰랐시요. 한 달을 그거를 했다. 지금은요 철농 한다고 그래도요, 밥 다 먹고요, 뭐 지하철 막차 시간까지밖에 안 해요. 근데 그땐 그 집 앞에서 한 달을 진짜 다리를 뻗어도 안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눕는 게 어딨습니까? 가만히 앉아 있다가 그 다음 날 아침이면 또 출근해서 잔업까지 다 하고 이랬드랬습니다. 그걸 한 달을 하니까, 얘네들이 그 돈을 다 주더라고. 그래가지고 아저씨들헌테 그 돈을 나눠주니까 월급보다 더 많았어요, 그 돈이. 그래가 아저씨들이 저만 지나가면 막 이러고요, 화장실에 낙서가 "진숙이를 국회로" 이런 게 막 나오고 그랬드랬어요.
한 날은 배 마스터 우
그래서 전 그때 그 아저씨 웃음을 보면서 저하고 한 약속이, 내가 딴 거는 몰라도 저 아저씨의 저 웃음만큼은 지켜 드리자. 저는 그때 노동해방이라는 거, 뭐 거창한 이데올로기는 잘 몰랐습니다. 기양 저 아저씨들이 저렇게 웃으면서 출근하고, 저렇게 웃으면서 일하시고, 저렇게 웃으시며 집에 가면, 그게 저한테는 꿈이었드랬습니다. 대공분실에서 3천만 원을 보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그 아저씨의 웃음이었드랬습니다. 내가 그 돈을 받으면 그 아저씨 웃음을 다시는 못 볼 것 같았드랬습니다. 그래가 저는 결국 그 돈을 못 받았습니다. 저는 그때 3천만 원이 아니라 한 50만 원 이렇게 얘기를 했으면 흔들렸을 거예요, 아마. 근데 그때 86년도에 3천만 원이면 꽤 큰 돈이거든요. 되게 감이 안 오는 거예요. 그러고 저는 노동조합을 이렇게 하면서 압니다. 저는 이 길에서 흔들렸던 적은 있었어요. 근데 저는 이 길을 후회해 본 적은 없습니다. 왜냐면 옳은 건 옳고, 틀린 건 틀렸다고 얘기하는 게 전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이제 마흔여덟 살인데요, 제 나이에 비해서 저는 가진 거는 별로 없습니다. 그치만 그 삶이 별로 아쉽다는 생각을 안 해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