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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어울리지 못한다

자본주의와 동시대에 발전을 거듭한 민주주의는 언뜻 보면 상호보완적이며, 서로 궁합이 잘 맞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 둘은 전혀 궁합이 맞지 않다.

첫째, 실질적 권력 관계를 살펴보면, 자본주의 하에서 실질적인 권력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자본가에게 있다. 생산수단을 모두 독점하고 있는 자본가 계급에 권력이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자본에 종속돼 있으므로 그들에게 실질적 통제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다수의 정치’, 즉 민중에게 권력이 존재하며, 민중에 의한 사회 통제를 의미하는 것인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몇 년에 한 번 주어지는 투표권을 가리켜 ‘민주주의’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설령 그러한 ‘형식적’ 투표로서 대표자를 선출해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해도, 그러한 ‘선출된’ 대표자를 쥐고 흔드는 것은 ‘자본’이라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다. 이라크 전쟁을 도발한 미국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을 선출해 준 민중의 뜻을 따랐는가?

고질적

둘째, 자본주의라는 것은 계급 분화를 즐긴다. ‘부익부 빈익빈’은 그러한 자본주의의 속성을 일면적으로 보여 줄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단지 자본주의가 가지는 계급분화적 특성을 가속화시킨 것이다.

‘1퍼센트 대 99퍼센트’라는 구호가 등장한 배경은 무엇인가? ‘기회의 평등’을 외치며 빈곤층의 빈곤을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전유물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생존에 허덕이는 노동계급에게 기회는 종종 박탈된다. 아니, ‘박탈당한다.’ 개인의 생존권을 가진 자들에게 담보한 이들에게 ‘기회의 평등’은 공허한 외침이며, ‘1퍼센트 대 99퍼센트’ 구호의 배경에는 그런 공허한 외침을 반복하며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전가하는 자본에 대한 분노가 있다. 그러한 불평등은 자본주의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돼 왔고, 불평등의 본질은 계급을 빼놓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철저히 ‘계급적’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원칙적으로 계급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본가든, 노동자든 똑같이 1인 1표다. 그러나 같은 한 표라 하더라도 그 둘이 가지는 가치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노동조합과 자본의 대결을 보라! 노동조합의 노동자나, 자본가나 민주주의라는 체제에서는 그 둘의 권리를 동등하게 인정하지만 현실적 힘은 누구에게 존재하는가? 실질적 권력, 마르크스의 언어를 빌리자면 ‘생산수단’이 자본가계급에게 독점돼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본주의에서 계급분화는 필연적인 것이고, 계급대립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런 계급적 대립을 망각한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형식적’인 것이다.

이런 어려운 설명을 곁들이지 않아도, 당장 가까운 이웃을 살펴봐도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보장한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헛소리임이 증명될 것이다. 중국은 후발자본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가?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발전한 한국에서 유신독재는 왜 발생했는가?

자본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보장하지 않는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단지 ‘형식적’ 민주주의만을 가지고 어린애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민중을 기만한다. 형식적 민주주의를 벗어나, 진정한 민중의 사회 통제는 자본주의를 벗어날 때에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