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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전에 살펴보는:
경제 위기와 대선, 대선 이후

이 글은 노동자연대다함께 최일붕 운영위원이 지난 11월 22일에 같은 제목으로 열린 노동자연대다함께의 한 포럼에서 발표한 연설문을 녹취·요약한 것이다.

경제 위기와 대선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무런 직접적 관계도 없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래 1992년 대선과 1997년 대선, 2007년 대선이 경제 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1992년 대선은 집권당의 승리로 끝났고, 1997년 대선은 34년간 일당 국가 바깥에서 온갖 박해를 받던 야당 지도자가 승리했다. 그런가 하면 2007년 대선은 ‘7·4·7 경제 공약’을 내세운 이명박이 이겼다.

방금 나는 경제 위기와 대선 사이에 직접적 관계가 없다고 했지, 간접적 관계도 없다고 말하진 않았다. 간접적 관계는 있다. 즉, 매개변수를 도입하면 위기와 선거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보이게 된다. 그 매개변수 중 단연 가장 중요한 건 선거 직전의 사회 세력 관계고, 그것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당시의 계급투쟁 수위다.

"선거에서 사회 변혁 운동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후보들을 뒷받침하는 운동이 있느냐, 그 운동의 성격이 무엇이냐다." ⓒ이윤선

1992년에는 노동자 운동이 일시 침체에 빠졌을 때였다. 첫째, 1989년 초 이래 혹심한 국가 탄압이 지속돼 왔다. 둘째, 1991년 강경대 타살打殺 사건의 여파로 5월 내내 ‘분신 정국’이 전개됐는데, 그 속에서 일어난 노태우 정부 하의 최대 항의 운동이 패배로 끝났다. 셋째, 1991년 8~9월 소련 몰락으로 당시 좌파는 사기 저하되고 방향 감각을 잃었다. 넷째, 1992년의 경기후퇴는 ‘전투적 노동조합주의’가 득세했던 당시 노동자 운동에 최초로 상당한 어려움을 안겨 줬다.

그래서 1987년 7~9월 노동자 대중 파업 때 ‘한국의 바웬사’로 불리던 권용목 씨는 1994년 〈말〉지 인터뷰에서 1992년이 ‘참 힘들었던 해였다’고 술회했다.

이처럼 1992년 대선은 주로 노동운동이 곤란을 겪던 조건 속에서 치러지는 바람에 패배하고 말았다.

1997년 대선은 이것과는 다른 상황에서 치러졌다. 1996년부터 노동자 운동이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해 임금 인상 투쟁이 상당히 성공을 거두면서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올라갔다. 그러던 때에 마침 김영삼이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1996년 12월 26일 국회에서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시키는 악수를 두었던 것이다. 이에 민주노총 노동자들이 1월 중순까지 대중 파업을 벌이며 대거 거리로 뛰쳐나와 항의 투쟁을 벌였다. 가장 많았을 때 37만 명의 조합원들이 청년·학생 들과 함께 ‘김영삼 퇴진’을 외치며 아주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 그래서 김영삼의 공식 사과까지 받아 냈다.

1997년 노동운동이 이렇게 전진하던 터에 이번에는 ‘IMF 공황’이 찾아왔고, 마침 노동자들이 크게 사기가 올라 있던 상황이어서 그것에 아주 잘 저항했다.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직면한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박해하던 야당 지도자(김대중)가 마침내 대선에 당선하는 것을 용인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최초로 야당이 승리했던 것이다.

2007년 대선은 진보진영 다수가 노무현에 대한 기대가 깨지면서 사기 저하했던 시기에 치러졌다. 2002년 40만 명이 참가한 촛불 집회의 주역인 청년들도 노무현 정권에 크게 실망하고 사기가 저하해, 역시 투표에 참가하지 않았다. 청년들과 노동자들이 기권한 덕분에 이명박이 ‘7·4·7 경제 공약’을 걸고 집권했다.

올해 대선이 치러지는 더 큰 맥락

한 달도 채 안 남은 올해 대선은 어떤 결과로 나타날까? 올해도 경제 상황이 위기인 건 확실하다.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위기라고 말할 수 있는데, 1997년 IMF 공황 때보다 덜 위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세계경제 상황이 더 어렵기 때문에 더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IMF는 올해 한국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두 차례나 하향 조정해 지난달 2.7퍼센트라고 발표했다. IMF는 이 전망치도 유럽 경제와 미국 경제의 호전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유럽과 미국 경제의 상황 변화에 따라 성장률은 더 하락할 수 있다고 암시했다.

그리고 세계 자본가들의 다양한 경제연구소들이 한국 경제가 “앞으로 그동안 겪어 보지 못한 장기 경기침체 국면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그 원인으로 그들은 수출 부진과 높은 가계부채, 고용 부진 등을 지적했다.

지금 노동계급 투쟁은 어떤가? 2008년 거대한 촛불 운동 후에 경제 공황이 찾아와, 노동운동이 부흥할 것으로 기대됐고, 실제로 2009년 초에 언론 노동자들의 저항부터 시작해 여름에 쌍용차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정점을 이루는 강력한 투쟁이 전개됐다.

그러나 그만 안타깝게도, 무지막지한 국가 탄압에 눌려서 쌍용차 노동자들은 패배를 겪었고, 그것 때문에 노동운동의 회복이 조금 지연됐다. 그러다가 올해 다시 상당히 회복돼, 노동쟁의가 이명박 정부 하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는 통계 수치가 있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자신의 정치적 표현을 이번 대선에서 찾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11월 14일 “박근혜·문재인·안철수의 노동 정책 공약에 희망이 없다”고 발표했다. 물론 문재인의 공약은 그나마 다른 후보들보다는 더 구체적인 노동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안철수의 공약은 ‘실망스럽다’고 했다.

그러니까, 조직 노동계급은 대선 후보 중 문재인을 일종의 ‘차악’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2002년 말 촛불 운동보다 훨씬 컸던 2008년 촛불 운동의 주역인 청년들도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1990년대 이래 민주통합당(이하 민주당)은 언제나 차악이었다. 이 차악에 대해 조직 노동계급과 2008년 촛불 청년들이 ‘차악도 악은 악이다’ 하며 투표장에 안 나갈지 아니면 ‘그래도 최악보다 낫잖아’ 하며 투표장에 나갈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돌아보면, 총선 전에 한미FTA 반대 투쟁과 제주 해군기지 반대 투쟁이 있었는데, 민주당은 이 투쟁을 배신했다. 국회로 등원해 버리고, ‘좋은 FTA가 있는가 하면 나쁜 FTA가 있다’는 헛갈리게 하는 소리를 하고, 제주 해군기지에 대해서도 ‘절차는 잘못됐어도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또, 민주당은 김진표 같은 신자유주의자들, 한나라당 출신자, 뉴라이트 출신 정치 철새 등을 공천했고, 김용민이 마녀사냥을 당할 때 자신들이 공천한 사람인데도 마녀사냥 당하도록 내동댕이쳐 버렸다. 이 일은 급진개혁주의적 정서를 지닌 많은 청년들의 마음에 상처를 줬을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누가 당선해도 그 정부는 세계경제와 제국주의 체제가 가하는 제약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경제 위기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겠다. 그리고 그 위기의 부담을 자신들에게 전가하려는 것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의 투쟁 경험도 살펴봄으로써, 특히 유로존의 경험을 살펴봄으로써 대선 이후 우리 나라 노동운동, 정치 정세 전반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 예측해 보겠다.

결정적 요인인 세계경제 위기

지난 5년간 경제 위기가 모든 정치 논쟁의 근저에 놓인 문제였다. 1930년대 대불황과 비교될 만한 이 위기는 40년에 걸쳐 세계 체제 전체의(평균적인) 이윤율이 낮았던 것의 결과다. 한동안 신용 확대로 시스템이 작동했지만, 이 과정은 결국 지속될 수 없었다. 지금 우리는 여러 해에 걸쳐 진행 중이던 위기의 결과를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 규모 세계 1위인 미국 경제는 성장이 여전히 매우 느리며, 실업률도 높은 수준이다. 그리고 미국 인구 여섯 명당 한 명꼴인 무려 5천만 명이 빈곤선 이하에서 살고 있다.

세계 2위인 중국 경제는 여전히 성장을 수출에 매우 의존하고 있고 수출 주도 분야들에 대한 투자가 놀라운 수준인데, 최근에 수출 감소로 성장률이 감소해 왔다. 중국 경제가 경착륙을 피할 수 있는지 여부는 두고 봐야겠지만, 중국이 세계 체제의 문제점들에서 면제될 수 없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세계 3위인 일본 경제도 수출 의존 경제인데, 역시 수출 감소로 경기후퇴를 겪고 있다. 노다 총리는 상황이 “심각하고”, 정부는 “위기 의식”을 갖고 상황에 대처하고 있다고 솔직히 시인했다. 일본의 GDP는 5백37조 엔인데, 물가 상승을 고려한 실질 GDP를 보면 1993년과 똑같다. 그러니까 20년 동안 일본 경제는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조금 성장하는 듯하면 금세 경기가 후퇴해서 수축하고, 또 성장을 하는 듯하다가 금세 수축을 하곤 했던 결과인 것이다.

이제 유로존을 살펴보자. 현재 유로존은 세계경제라는 “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레닌)다. 이 지역의 비교적 취약한 경제들은 남부유럽의 경제들인데, 그동안 위기 속에서 그 경제들이 국가 채무를 쌓아 오면서 구조적 문제들이 드러났다. 그 구조적 문제들은 매우 다양한 경제들이 단일 통화(유로)와 단일 중앙은행(ECB)으로 묶였던 것에서 비롯한 것들이다.

남부유럽에서 상황이 가장 심각한 그리스는 제2차 채무불이행(디폴트) 전망이 너울거리고 있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도 채무불이행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그런데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의 경제 규모는 그리스보다 훨씬 커, 기존의 구제금융 기금으로는 구제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유럽 지배계급들은 만일 스페인이나 이탈리아가 국가 부도가 난다면 유로화가 끝장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남부유럽 경제만 위험한 것이 아니다. 영·프·독 경제들처럼 더 강력한 경제들 앞에 놓인 전망도 유럽 지배계급들에게 위험 요소가 되고 있다. 특히 독일은 그리스·포르투갈 같은 나라들의 부채 부담을 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 유로존의 나라들은 총체적인 난국 속에 있다. 이러한 난국 때문에 유럽 지배자들은 서로 다른 위기 타개책을 내놓고 언쟁을 하고 있다. 게다가 자국 자본가들의 이익을 보호하려 애쓰느라 논쟁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다.

유럽 금융 위기가 심각했던 지난해 11월에 프랑스 경제장관이었던 프랑수아 바루앙은 최근 실토하길, 당시 프랑스 정부 관료들이 그리스·이탈리아와 함께 유로존을 탈퇴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었다고 한다. 만약 그랬다면 이는 유럽연합의 다른 한 축인 독일의 뒤통수를 크게 한 방 때리는 셈이었을 것이다.

물론 상층의 지배자들이 싸우기만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이 모두 합의를 이루고 있는 게 한 가지 있는데, 이 위기의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지워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구제’ 금융을 받는 나라에 ‘긴급 개입’을 할 때마다 ‘공공 지출을 줄여라, 노동자들을 더 쥐어짜야 한다, 임금도 더 낮추고 더 오래, 더 열심히 일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컨센서스다.

2010년 긴축에 반대해 싸우고 있는 그리스 노동자들 경제 위기 속에서 그리스 대중 파업에는 작업장 점거 같은 일이 일어났고, 다양한 지역 행동과 부문 행동 들이 우후죽순처럼 분출했다. ⓒ출처 George Laoutaris (플리커)

이러한 정책으로 대중은 엄청난 고통을 겪었고, 위기는 오히려 악화됐다.

전체적인 그림은 경제가 비교적 부진한 가운데 때때로 커다란 두려움과 불안을 자아내는 공황이 찾아오고, 막 땜빵을 해서 한숨 돌리는 듯한 상황이 오면 또다시 공포의 공황이 오고, 그런데 이 간격은 점점 좁아지는 패턴인 것이다.

지속적이고 강력하게 위기에서 회복되려면 이윤율이 회복돼야 한다. 그러려면 지배계급에게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 첫째, 악성 부채가 상각돼야 한다. 둘째, 노동계급을 공격해 착취율을 높여야 한다. 셋째, 자본이 충분히 파괴되고 평가절하돼야 한다.

‘자본 파괴’를 쉽게 표현하면, 기업이 망해서 공장과 기계 설비류들이 헐값으로 다른 기업에 팔려가는 상황, 또 주가 총액 지수가 반토막 나거나 3분의 1쯤으로 폭락하는 것 등을 가리킨다.

그렇게 자본이 파괴되면 이윤율이 올라간다. 왜냐하면 이윤율은 투하한 자본 대비 이윤의 비율이므로 자본이 파괴되거나 평가절하되면 이윤율이 올라간다. 그렇게 되면 경제가 위기에서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그런 과정이 그다지 진척되지 않았다. 따라서 위기는 초기 단계일 뿐이고, 앞으로 지속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 위기가 계속됨에 따라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위기와 혼란도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위기가 우리의 전망에 출발점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저항과 양극화

위기가 자동으로 저항을 불러일으키진 않는다. 그럼에도 지배계급의 내분이 너무 심해 지배자들이 기존의 방식으로 지배할 능력이 약화되고, 또 피지배자들이 느끼는 고통이 너무 커서 도저히 전통적 방식으로 지배받고 착취당하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점점 더 많이 하면서 점점 더 투쟁이 무르익을 수 있다.

그래서 몇몇 나라들에서는 강력한 노동운동이 발전했다. 예컨대 프랑스·이탈리아·포르투갈·스페인 같은 데서 대중 파업이 일어났다. 물론 지금까지 가장 높은 투쟁 수준은 그리스에서 볼 수 있다.

그리스에서는 2010년 이후 평균 6~7주마다 총파업이 일어났다. 그러한 대중 파업에는 작업장 점거 같은 일이 일어났고, 다양한 지역 행동과 부문 행동 들이 우후죽순처럼 분출했다. 이런 행동들 속에서 노동자 활동가들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그런 네트워크들이 투쟁을 발전시키는 데서 핵심적 구실을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그리스는 위기의 영향으로 아래로부터의 분출이 있을 수 있다는 점과 이 운동들 덕분에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자들의 확신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긴축을 둘러싼 논쟁과 투쟁으로 정치적 양극화가 더 첨예해졌다. 많은 유럽 나라들에서 극우가 성장했다. 그래서 공공연한 나치 조직인 그리스 황금새벽당은 6월 선거에 7퍼센트를 득표했다.

마린 르펜이 총재인 프랑스 국민전선 FN은 대통령 선거에 6백40만 표를 얻었다.

동유럽에서도 극우 세력이 성장해, 2010년 헝가리 선거에서 조빅당은 15퍼센트 득표율을 기록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파시스트는 아니지만 매우 우익인 박근혜가 새누리당을 포함한 우파 전체를 결속시키고 있다. 한국에서는 중단기적으로 파시즘의 위협보다는 전통적 우익이 국가 기구의 권위주의화를 추진하는 방식으로 극우의 위험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왼쪽에서도 위기의 수혜자가 있다. 좌측의 주요 수혜자는 많은 경우, 전통적인 개혁주의 정당이었다. 특히 그 정당들이 한동안 야당으로 밀려나 있었던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가장 명백한 사례는 프랑스 사회당이다. 사회당은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가 승리하고 총선과 지방선거에서도 승리를 거뒀다.

독일 사회민주당도 앙겔라 메르켈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커짐에 따라 봄에 독일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주인 북부 라인-베스트팔렌 주에서 완전한 과반수를 얻으며 다수당이 돼 부흥하고 있다는 징후를 나타내고 있다.

전통적 개혁주의 조직들은 최근 수십 년 동안 우경화했다. 그럼에도 조금 덜 사악한 버전의 긴축 정책을 시행할 것처럼 보이면 그들은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민주당이라는 포퓰리스트 부르주아 정당이 전통적 개혁주의 세력인데, 민주당이 10년 동안 집권하면서 지지자들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새누리당과 박근혜가 십분 활용한 덕분에 민주당은 총선에서 패배했다.

그런데 전통적 개혁주의 세력만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동시에, 그보다 좀더 급진적인 세력도 그런 정당의 왼쪽에 있는 공간을 채우는 경우가 적잖이 있다. 프랑스 좌파전선의 장뤼크 멜랑숑은 긴축 반대, 부유세, 은행·에너지기업 국유화 등 좌파적 강령을 바탕으로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에서 11퍼센트를 득표했다.

스페인 공산당이 주도하는 좌파연합은 여름 동안 13퍼센트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다시 그리스의 경우를 보면, 시리자 연합은 6월 선거에서 무려 27퍼센트의 득표율을 과시했다. 1970년대 이래로 유럽에서 이보다 더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좌파 정당은 없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지난해 연말과 올해 초쯤 통합진보당이 한때 지지율 20퍼센트 이상이라는 놀라운 기세로 민주당의 왼쪽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격심한 내분이라는 자살골로 통합진보당은 사분오열했고, 한국의 진보진영과 그 좌파는 전보다 더 복잡하고 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절망적인 건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기층 노동자들의 의식과 조직이 파괴된 것이 아니라, 상층의 정치 지도자들, 지도부들이 분열해서 노동자들이 방향 감각을 상실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좌파적 개혁주의의 부상

서유럽의 좌파적 개혁주의 조직들은 주류 개혁주의 정당들의 긴축 정책 지지(또는 절반만 반대)에 이의를 제기하고, 자기들은 거부하겠다고 공공연히 표방함으로써 지지를 얻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좌파 정당임은 맞다. 하지만 개혁주의적이라는 점도 사실이다. 가령 멜랑숑은 칠레의 아옌데 정부(1970~73)가 ‘너무 나아가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이런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들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정당들보다 분명히 더 역동적이고 더 급진적이다. 그렇기는 해도 개혁주의라는 스펙트럼상에 있고 혁명적인 좌파는 아니라는 점도 봐야 한다. 이는 우리가 던져야 하는 두 가지 질문에 답변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나는 ‘그들이 반자본주의 투쟁의 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그들의 한계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첫째 물음에 답변해 보자. 그들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이나 적어도 그에 대한 염원을 반영한다. 그 조직들이 성공하면 노동계급의 확신과 기대를 높일 수 있고, 그래서 그들보다 더 폭넓은 전체 좌파를 강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력의 발전을 환영해야 한다. 한국에도 민주당 같은 포퓰리스트 부르주아 정당들의 왼쪽에서 건설되는 진보 정당들이 몇 개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지지해야 한다.

왜 우리는 이런 움직임을 지지하고 어떤 경우엔 개입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노동계급이 일단 떨쳐 일어서기만 하면 자신의 전통적 조직에서 자동으로 벗어나 혁명적 좌파 쪽으로 끌려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환상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유럽에서든 한국에서든 혁명적 좌파는 여전히 매우 작은 세력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더 일반적으로 노동자들의 의식은 정치적 경험 없이 갑자기 비약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레온 트로츠키가 《러시아혁명사》 앞부분에서 지적한 점을 곱씹어 볼 만하다. 즉, 대중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개혁주의의 한계를 배워 나아간다. 트로츠키는 그것을 ‘근사치 조정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점점 근사치에 접근함으로써 혁명적 입장으로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투쟁을 통해 스스로의 힘에 기댈 줄 알게 되기까지 그렇다는 말이고, 또한 신뢰할 만한 대안이 당기고 있어야 한다. 당기는 게 없으면 그렇게 급진화하다 멈출 것이다.

두번째 질문에 답변하려 한다. 개혁주의의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개혁주의는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않고 기존의 기관들, 특히 국가 기구들을 ‘포획해’ 그 안에서 활동하면서 조금씩 개혁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자본주의 체제가 제공할 수 있는 것과 자본주의 지배계급이 양보할 각오가 돼 있는 것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이러한 개혁주의의 한계 때문에, 아무리 좌파적 개혁주의일지라도 변화의 염원을 한동안 효과적으로 표현하다가 갑자기 지지를 잃을 수 있다. 독일의 좌파당이 근래 지지를 많이 잃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 같다.

독일 좌파당은 창당 후 한동안 기대를 모았다가, 유권자들이 ‘정말로 저 당이 우리 처지를 개선시켜 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면서 ‘그럴 바에야 다시 전통적인 개혁 정당, 좀더 자원이 풍부하고 세력도 확고한 쪽에 기대는 게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결과, 최근에 사회민주당이 떠오르고 좌파당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인 것이다.

한국에서도 민주당의 왼쪽에서 건설되고 있는 진보정당들이 장차 좌파적 개혁주의로 떠오른다 하더라도 이럴 위험이 존재한다. 이미 우리는 2004~2006년에 그런 경험을 했다. 2004년에 노무현 탄핵의 역풍이 불어 서울에서만 25만 명이 거리로 나온 항의 운동 덕분에 그 직후의 총선에서 민주당(당시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이 크게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1년 뒤쯤에는 함께 하강해 버렸다.

물론 이번에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통합진보당 측의 자책골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개혁주의 정당은 그럴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심지어 가장 괜찮은 시나리오를 그려 봐도 좌파적 개혁주의자들의 집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가령 그리스 시리자가 지난 6월 선거에서 승리했고, 진정으로 긴축과 결별하려 했다고 가정해 보자.

승리 즉시 시리자는 그리스와 유럽의 지배계급들이 가하는 압박에 직면했을 것이다. 그리스와 유럽의 지배자들은 새 정부를 유럽연합·IMF·유럽중앙은행, 즉 트로이카의 의지에 굴복시키려 하거나, 그것에 실패하면 헌법적 수단으로든 비헌법적 수단으로든 그 정부를 제거하려 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결정적인 것이며, 혁명가들이 이 투쟁 내부에서 독립적인 요인으로 개입할 수 있는 경우에 투쟁의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다.

한국도 긴축 예정

유럽의 경험에서 통찰을 얻었으니 한국으로 돌아와 결론을 내리자. 11월 8일 여의도 사학연금회관 회의실에서 경제정의실천연합 주최로 ‘정부 세제개편안 및 예산안 평가 토론회’가 열렸다. 거기서 시민경제사회연구소 홍헌호 소장은 2013년도 정부 예산안 평가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를 제시했다.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은 사실상 긴축재정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특히 복지 분야 지출을 줄일 의도라는 지적이다.

그 토론회에서는 정부가 이 같은 긴축 예산안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장기 국가채무 전망치를 과도하게 잡았다는 지적도 많았다.

경상남도, 울산시, 인천 부평구, 강원도 등 지자체들도 긴축재정을 실시할 계획이다.

꼭 국가나 지방정부의 공식적인 긴축 예산안이 아니더라도 임금을 깎거나 노동강도를 늘린다거나 대량 해고를 하는 것도 바로 내핍을 강요하는 것이다.

프랑스 사회당이 6개월 만에 긴축 예산안을 받아들였는데, 과연 박근혜나 문재인이 된다면, 박근혜는 3개월쯤 걸릴까, 문재인은 6개월이나 8개월쯤 걸릴까?

따라서 누가 되든 우리 노동계급과 피억압자들을 공격할 것이다. 거기에 대응해, 노동운동은 정치적으로는 정치 지도자들이 사분오열돼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기층의 조직이 건재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부분만 잘 강화하면’ 반격할 수 있다. ‘정치적인 부분’은 근본적 사회 변혁을 위한 운동가들이 그런 움직임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제국주의 시스템의 아시아태평양 부분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불안정이 증대하고 있다. 올해 우리는 남중국해(황옌다오/스카보러 숄)와 동중국해(댜오위다오/센카쿠)에서 관련국들(중국-필리핀, 중국-일본)의 긴장이 분출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런 불안정의 밑바탕에는 세계 자본주의의 변동이 있다. 즉,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는 장기적인 이윤율의 위기를 겪고 있고, 그런 와중에 국가 간 상대적인 경제력 비중에 중대한 변화를 겪고 있다. 미국의 상대적 쇠퇴와 중국의 부상이라는 이 추세는 2008년 경제 위기 속에서 가속됐다. 중국은 미국의 경제적 라이벌일 뿐 아니라 지정학적 라이벌로도 떠오르고 있다. 중국의 해군력 증강을 봐도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물론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도전 세력의 등장을 허용하지 않고 자국의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오바마 정부는 올해 발표한 신국방전략을 통해서도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국가 간 동맹을 구축하려 한다. 올해 미국이 추진한 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의 안보 협력을 보면 노골적인 중국 포위를 확인할 수 있다.

한반도는 이와 같은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불안정에 긴밀히 연동돼 있다. 하나는 미국이 북한을 탈냉전 시대의 새로운 위협으로 지목하면서 군사적 대응의 명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동맹 강화 전략 때문이다. 대선 후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한미동맹의 공고화를 대전제로 하면서 한중 관계도 발전시키겠다는 구상인데, 이는 한미동맹을 중국 포위의 주요 축으로 삼으려는 미국의 전략에 직면해 큰 모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미국 주도 MD 참여를 둘러싼 논란, 장차 불거질 방위비 분담률 인상 문제 등).

결론

투표 자체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다. 투표는 노력이 거의 안 드는 행위다. 선거에서 사회 변혁 운동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후보들을 뒷받침하는 운동이 있느냐, 그 운동의 성격이 무엇이냐다.

박근혜를 뒷받침하는 게 1퍼센트 부유층임은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에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야권 후보가 만약 문재인으로 단일화된다면 민주노총 노동자들은 그를 차악으로 규정하면서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내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그에게 투표하는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할 것 같다. 나는 조직 노동계급의 입장에 서 있는 우리도 불가피하게 같은 입장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본다.

이처럼 여전히 우리는 부르주아 양당이 좌지우지하는 제도 정치권 하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진보 정치 세력들은 각개 ‘약진’이 아니라 각개 ‘기어가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이 건설되는 움직임, 그런 움직임에 뛰어들어야 한다.

물론 혁명가들의 독립적 조직을 유지하면서 거기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렇게 됐을 경우에 우리는 누가 되든 차기 정권이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그에 맞선 저항이 벌어질 때, 괜찮은 위치에서 괜찮은 수준으로 저항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혁명적 조직을 강화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