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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국민을 속이는가?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김대중 죽이기》를 써서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애썼던 강준만 교수는 《노무현과 국민 사기극》을 통해 내년 대선에서는 노무현을 밀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시사저널〉은 이 책의 제목을 "노무현이 차기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이유"로 달아도 어울릴 것이라고 했다.

최근 노무현은 각종 여론 조사에서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정치 증권 사이트에서 노무현의 주가는 이회창을 눌렀다. 〈한겨레 21〉의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은 호감가는 정치인 1위를 차지했다.

노무현의 부상 이유는 그가 학연과 지역주의에 찌든 기성 정치인들보다 상대적으로 참신해 보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상고를 나와 사법고시에 합격해 판사를 지낸 입지전적 인물이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과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사건의 변론을 맡아 인권 변호사로 알려진 그가 결정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1988년 5공 청문회였다. 지난해 4·13 총선 때는 당선 가능성이 높은 종로를 포기하고 ‘지역감정 타파’를 명분으로 부산에서 출마해 낙선했다.

강준만 교수는 노무현이 〈조선일보〉와 정면으로 싸운 유일한 정치인이라는 점을 높이 산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언론의 눈치를 보거나 유착 관계를 맺고 있는 데 반해 노무현은 유일하게 언론사를 상대로 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 교수는 노무현이 "진짜" 개혁 정치인이라고 주장한다. 강준만 교수는 국민들이 노무현 같은 개혁가를 몰라 보는 것은 "범국민적 사기극"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한 발 양보해 노무현이 이인제나 이회창보다 상대적으로 ‘개혁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해도 강준만 씨는 왜 똑같이 수구 언론으로부터 배제당하는 민주노동당 같은 진보정당을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는 걸까? 계급 운동의 관점에서 들여다 보면 노무현과 기성 정치인들의 차이는 붕어빵과 잉어빵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개혁적 이미지’로 포장된 시장주의자

우선 노무현은 김대중과 민주당 내 동교동계로 상징되는 ‘보스 중심·파벌 중심’ 정치를 근본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3김 청산’을 외치며 평민당과 민주당의 합당에 반대했던 노무현은 결국 1997년 대선 직전 김대중의 민주당에 입당했다. 최근에는 당정쇄신을 주장하는 소장파들이 ‘동교동 2선 퇴진론’을 펴는데도 노무현은 "권노갑 씨가 경제정책을 좌우해서 어려움이 왔"냐며 ‘동정론’을 폈다. 당내 세력 기반이 없는 노무현은 자신이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한 김중권에게 "같은 영남 출신 정치인끼리 등질 이유가 없지 않느냐"며 구애를 펼치고 있다.

영남 출신인 자신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어야 지역주의를 타파할 수 있다는 노무현의 주장은 민국당 김윤환의 "영남후보론"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이 책은 마치 영남 사람들이 모두 지역주의의 수렁에서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할 구제불능인 것처럼 얕잡아 본다. 그러나 1999년 울산 동구청장 재선거에서 이영순 씨가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을 벌이며 당선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지난해 총선 때 울산과 창원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들이 상당한 득표율을 기록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남 사람들 모두가 언제나 지역주의의 볼모인 것은 아니다. 의식은 집단적 경험을 통해 바뀐다. 지역주의는 영호남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의 경험, 그것을 추구하는 계급 정치를 통해서 사라질 수 있다.

노무현의 개혁성은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 데다 그조차 시장 개혁이다.

그는 "한국에서는 인권 문제는 확실히 진보하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 문제가 하나의 쟁점으로 남아 있습니다만 그 외의 인권 문제들은 거의 해결되고 있습니다. 노동권의 쟁점 사항은 국민의 정부 들어서 거의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 개혁 입법들이 좌절되고 김영삼 집권 시절보다 구속 노동자 수가 더 많은데 도대체 무엇이 해결되었다는 것일까?

노무현은 새처 시대를 흠모하는 시장주의자다. "새처 시대에 영국 공항이 마비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탄광노조와 싸우느라 1년 이상 온 나라가 벌집 쑤신 듯했어요. 사회 구조 개혁에 그만큼 시간이 걸렸습니다. 국민의 인내심과 지지가 그 바탕이 됐던 거예요. 우리 국민은 5·6공 때는 그 가혹한 정치마저 잘도 참아 내더니 요즘은 이거 너무 한 것 아녜요?"(《신동아》, 2001년 1월호)

노무현이 한때 친노동자적이었다고는 하나 1998년 현대차 파업 중재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 정리해고 수용을 권유했다. 그런데도 강준만 씨는 노무현의 파업 단속 활동을 추켜세우며 수구 언론들이 그의 울산 ‘활약상’을 조명하지 않았다고 불평한다. 노무현은 최근에도 대우자동차 노조를 방문해 김대중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에게 "큰 틀에서 대우차 문제가 해결돼야지, 노조원들의 기만 살리는 일에는 관여할 수 없다"고 말하다 노동자들로부터 계란 세례를 받았다.

낡은 주문

강준만 씨는 우리 사회의 근본 대립 전선이 수구와 개혁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에게 유일한 대안은 기성 정치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 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시민단체들마저 김대중에게 등을 돌린 지금 이 순간에도 강준만 씨는 김대중의 개혁 실패가 수구 보수 세력 때문이라는 낡은 주문을 반복한다.

하지만 1987년 이후 한국 사회는 수구와 개혁, 민주와 반민주의 대립보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계급 대립이 더 근본적이고 첨예한 사회로 탈바꿈했다. 강준만 씨는 김대중 정권을 "역대 정권들이 위기 돌파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왔던 ‘공안 정국’이라는 카드를 쓰지 않은 정권"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는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인가.

강준만 씨는 한 술 더 떠 "일부 개혁 세력의 DJ에 대한 강한 불신"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대중에 대해 강한 불신과 환멸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단지 "일부 개혁 세력"뿐만이 아니라 국민의 대다수다. 노동자들은 김대중에 대한 불신을 넘어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성 정치에 대한 환멸과 냉소에 빠지는 것은 부르조아 정치권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철저한 ‘계급 이기주의’ 때문이다. 수구 보수 언론의 왜곡 보도나 악선동에 인질이 됐기 때문이 아니다.

강준만 씨는 선진 노동자들이 김대중과 노무현과 모든 기성 정치를 뛰어넘어 민주노동당이라는 독립적인 대안 건설에 착수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역사적 진보를 전혀 보지 않는다.

임미정

‘노동운동 위기’에 대한 참신한 진단 강수돌, 이후

왜 민주노총의 1차 총력 투쟁은 별 성과 없이 마무리됐을까? 현대차와 현대중공업의 노조를 비롯한 대기업 노조는 왜 2차 파업에 참가하기를 꺼렸을까? 작년과 올해 초 대우차·전국전력·도시철도·철도·한국통신 노조 지도자들의 항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모두 현장 조합원들의 자생성과 전투성이 충만하지 않았던가? 한국통신 노조 위원장의 114 안내 분사화 인정이나 캐리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정규직 노조의 냉대는 노동자 운동 중심성이라는 주장과 모순되는 것 아닌가? 노동자 운동이 사회 변혁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노동자 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한 번쯤은 던져 봤음직한 물음들이다.

그 동안 일각의 논자들은 노동운동의 위기를 자본의 위기에서 곧바로 이끌어 내거나 전투적 조합주의가 화근이었다는 식의 진단을 내렸다.

노동운동의 위기가 자본의 위기에서 온다는 주장은 자본이 위기에 빠져 있는 동안 후퇴와 양보는 불가피하다는 숙명론을 함축하고 있다. 이런 주장에 따른다면 위대한 투쟁들이 경제 위기 시기에 벌어졌던 역사를 설명하기 힘들다. 1936년 프랑스 노동자들은 강력한 대중파업을 통해 주 40시간 노동, 유급 휴가, 7∼15퍼센트의 임금 인상을 얻어 냈다.

전투적 조합주의로는 최소한의 요구조차 따낼 수 없다는 주장은 지도부의 정책이나 협상력에 더 많은 중요성을 둔다. 위와 같은 진단에 비하면 강수돌 교수의 진단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노동의 희망》에는 노동운동이 위기인가 하는 물음에 정직한 목소리로 답하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의 위기 진단

저자는 ‘노동운동의 위기’를 "비단 ‘IMF 체제’라고 하는 과도기적 상황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전투적 조합주의 탓이라는 주장은 투쟁 결과에만 치중하는 분석이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주체의 위기를 조직화의 위기·‘현장 권력’의 위기·지도력의 위기·이념의 위기 등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저자는 위기의 핵심을 주체적 대응 문제에서 짚고 있다.

예를 들어 조직화의 위기에 대한 그의 진단은 어떨까?

저자의 지적은 조직률 하락을 마치 노동운동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징표인 것처럼 과장하는 주장들과는 사뭇 다르다. 저자가 소개하는 한 연구에 따르면, "다른 조건이 같다면 각 조직이 신규 조직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조직 비용을 투여했는지가 조직률에 의미있는 변화를 초래한다."

더구나 대중의 급진화 덕분에 민주노총 조합원 수는 작년 9월에 비해 2만 5천여 명이 더 늘어났다.

저자는 "조직화"를 단지 형식으로만 이해하지 말하고 주장한다. 대신 그는 "살아 있는" 조직화를 강조한다. 살아 있는 조직화란 무엇일까? 예로 실업자 조직에 관한 그의 말을 들어 보자. "실업자들의 사회 의식과 자기 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 ‘실업자 토론 대회’나 ‘실업자 학교’ 같은 것을 열 수도 있다." "문 닫고 앉아 기다리는 조직화가 아니라 문을 열고 현장으로 달려 가는 조직화를 위해 컴퓨터 네트워크나 각종 소모임 활동망도 활용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조직화는 의례적인 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활동이라는 주장이다.

저자는 노동자들을 경쟁으로 내모는 각종 인사고과·팀제 같은 제도뿐 아니라 노조 지도부의 양보 교섭과 직권 조인도 사기를 떨어뜨리는 데 한몫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강수돌 교수가 말하는 "현장 권력 위기"의 중요한 원인이다.

"지도력의 위기"와 "이념의 위기"를 말하는 대목에서 그는 "노조 지도부의 관료주의화", "협상에 기초한 정책 제안", "노사정위와 정책 참가"에 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그는 ‘국익·회사 살리기·국난 극복’ 같은 이데올로기에 대해 노동자 운동이 저항력을 갖추지 않는 한 위기는 극복되기 힘들 거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민주노총 지도자들에게 묻는다. 노사정위 참여는 비판하면서 대정부 대화에 기대를 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대목은 얼마 전 민주노총 지도부가 청와대 면담을 요청한 뒤 차갑게 거절당했던 치욕을 떠올린다.

무엇을 바꿀 것인가

강수돌 교수가 내놓는 대안은 ‘생동하는 연대’다.

그는 연대의 좋은 사례와 나쁜 사례를 제시한다. 직장 투쟁의 다양한 경험들이 등장한다.

"희생양 찾기를 중단하라."는 대목에서 저자는 "고용 위기 시대에 가장 열악한 조건 속에서 주변화되거나 배제당하는 집단들에 대해 [민주노조 운동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반면, 그는 모범 답안으로 1997년 부산 사하 지역의 한국기계 남녀 노동자들이 여성에게 해고 통지서를 보낸 것에 항의해서 정리해고를 막아 냈던 경험을 예로 들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생동감 있는 연대의 내용에는 여러 가지 참신한 지적들이 많다. 그는 "발상의 전환을 통한 조직 문화 혁신"이 시급하다고 언급하면서 "관습과 매너리즘의 타파"를 말한다.

저자의 혁신 방안은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예로 그는 집회 방식을 들고 있다. 그는 집회가 너무 문화 공연 위주이거나 의례적 연설 일색임을 지적한다. 참가자들에게 가르치려고만 하고 수동적으로 만드는 집회 방식을 지양하자고 말한다. 집회가 자유로운 토론과 의견 개진의 장이 된다면 투쟁을 확대하는 데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집회에 참가한 많은 노동자들이 노래 부르고 율동 배우느라 정작 하고 싶고 듣고 싶은 얘기를 뒤로 한 채 흩어져야 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현장 토론 강화가 바로 현장 민주주의를 이루는 핵심이라는 저자의 지적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그는 말과 행동이 종종 일치하지 않는 점을 혁신해야 한다며 이렇게도 말한다.

"우리 운동 내부에는 너무도 변명이 많고 현실적 조건이 많고 좀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거짓말도 너무 많은 듯하다." 그는 1997년 1월 대중파업 당시 호주의 항운 노동자들이 한국 물자의 하역 거부를 제안하며 연대 투쟁을 펼치겠다고 했을 때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가 그 제안을 거부했던 사례를 들고 있다.

아쉬움과 논란

그러나 이 책은 적지 않은 의문점과 논란거리를 남긴다.

강 교수는 협상 중심의 정치를 비판하면서 대중 투쟁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대중 투쟁이 벌어진다면 정치적 지도력은 마치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처럼 돼 있다(숙명론). "노동자는 대중 투쟁 속에서 자신의 계급적 직관과 투쟁의 힘을 바탕으로 정치력과 협상력을 발휘하여 왔다."(145쪽)

게다가 저자의 주장은 특정한 정치뿐 아니라 모든 정치가 문제라는 결론을 암시한다. 이것은 아나키즘의 관점이다.

"아래로부터의 노동운동이나 생태운동이 그 자체로 매우 강력하다면 굳이 노동자 정당이나 녹색당이 필요 없었다."(153쪽) "현장의 통일과 연대에 기반한 강력한 노동이 존재한다면 이미 그것 자체가 노동자의 산별이요, 노동자의 전국연합"이다. "산별 조직도 노동자 정당도, 노동자 대통령도 따로 필요한 것이 아니"다.(154쪽∼156쪽)

그러나 대중 운동의 승리를 위해서는 지배자들의 갖가지 이데올로기 공세와 분열 시도에 맞설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이 필요하다. 여전히 남북 화해·협력 문제, 언론 개혁, 탈북자 문제 등에 민주노조 운동이 회피하지 않고 명쾌한 입장을 제시·설득·논쟁하는 것은 대중 투쟁 확대를 위해 꼭 필요하다. 이것의 결여가 바로 민주노총 1·2차 파업의 약점이다.

둘째, 저자는 ‘생동하는 연대’는 삶의 자율성 강화라고 주장하는데 그 예로 생활협동조합을 들고 있다. "권력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서는 생산 거점과 생활 거점을 연결시키는 민중연대 운동을 전개해야 하며 ‘지역’이라는 공간은 이러한 실천적 연대를 담보할 주요 기제이다."

강수돌 교수는 유기농 농산물을 직접 생산하고 도시의 소비자들과 직거래하는 한마음 공동체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의 다른 저서 《작은 풍요》(이후)에는 이런 공동체 운동의 다양한 사례들이 소개돼 있다.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윤 체제가 강요하는 착취와 억압과 스트레스에서 하루라도 벗어나서 살기를 바란다. 협동조합 공동체에 매력을 느낀다면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협동조합 생활 공동체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라도 특정 노동자 집단이 이룬 사회적 소유의 형태다. 그러나 그 공동체는 다른 기업과 경쟁하지 않고서는 살아 남기 힘들 것이다. 공동체에 관한 저자의 생각을 접하면서 자본주의 안에서 공동 소유와 공동 분배를 이룰 수 있다고 여기는 공상적 사회주의를 떠올리는 건 무리일까?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이 만나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노동자 운동은 새만금 간척 반대 캠페인 같은 환경 쟁점에 기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환경 운동과 노동자 운동의 접점면을 넓히자며 제안한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만들자는 운동"은 자본주의 안에서 생태주의 대안을 건설하자는 결론이다. 이 또한 공상이라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노동조합 관료주의의 토대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 또한 이 책의 약점이다. 그 때문에 관료주의를 효율성의 문제로 이해(《진보평론) 2001년 여름호, 노동의 희망 서평, 노중기)하는 주장에 근본적인 저항력을 갖추지 못한 것 또한 아쉬움을 남긴다.

김어진

독점에 대한 통쾌한 폭로

패스워드라는 대단히 부적절한 한국어 제목이 붙어 있는 이 영화의 원 제목은 안티트러스트(Antitrust:반독점)이다. 제목 그대로 이 영화는 시장의 경쟁 체제가 필연적으로 불러 오는 독점의 추악한 모습을 그리고 있는 좋은 영화다.

팀 로빈슨이 전 세계 미디어 시장과 컴퓨터 시장을 통제하는 너브 사의 사장 게리 윈스턴 역을 맡았고 라이언 필립이 이에 맞서는 젊은 컴퓨터 천재 마일로 역을 맡았다.

영화 속 게리 윈스턴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를 그대로 본땄다. 옷차림이나 성격 그리고 흡사 우주 정거장을 연상시키는 어마어마한 집과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그림으로 변화하는 디지털 액자까지 빌 게이츠의 것 그대로다.

창조적이고 의욕적인 젊은 컴퓨터 천재 마일로는 절친한 친구 테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너브에 입사한다. 시냅스라는 인공위성을 이용해 모든 디지털 통신 기기를 통합하는 네트워크 시스템 개발에 참가한 마일로는 시냅스의 완성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프로그램을 도둑질하고 살인조차 서슴지 않는 게리 윈스턴의 모습을 발견한다.

영화는 스릴러 형식을 취하고 있어 시종일관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주변의 어떤 사람도 믿을 수 없고, 함정 너머에 다시 함정이 펼쳐지는 상황과 매우 적절한 반전은 보는 이를 즐겁게 해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게리 윈스턴을 통해 사실적으로 드러나는 위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자본가의 모습이다.

팀 로빈슨은 이 역할을 대단히 잘 소화했다. 편안한 평상복 차림과 똑똑하고 천재적인 몽상가의 모습 뒤에 감춰진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재벌의 모습은 빌 게이츠의 삶을 그대로 표현했다.

컴퓨터 회사들의 폭발적인 경쟁은 기술력과 정보 그리고 자본의 독점을 낳고 있다. 영화 속 시냅스는 전 세계 텔레비전·인터넷·라디오·전화를 하나로 통합하는 계획이다. 이것은 더 이상 망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 너브와 같은 거대 기업은 마치 잡지와 미디어업체인 타임워너사와 인터넷 서비스 공급업체인 AOL과 합병한 것처럼 현실에서도 나타나 있다.

이러한 기업들은 공개 소프트웨어와 공개 정보를 만들어 내는, 창의력을 지닌 젊은 해커들을 죽이기에 여념 없다. 실제로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매년 30여 개의 작은 경쟁사들의 기술을 사서 없애 버린다.

이 영화가 개봉되자 미국 언론은 대단히 거슬렸는지 〈뉴욕 포스트〉, 〈위싱턴 포스트〉 등의 신문에는 일제히 진부한 영화라며 조롱하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정보와 기술을 소수가 소유하고 통제하는 현실을 대단히 재치있고 통쾌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영화를 본 후 빌 게이츠의 탐욕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세계를 터는 강도》(로베르토 디 코스모, 영림 카디널)를 참고하기 바란다.

김태현

올 여름에 꼭 읽어야 할 책 (《칼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 정영목 옮김; 푸른숲 발행)

1883년 3월 칼 마르크스의 시신 발인을 보기 위해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모인 사람은 겨우 11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의 벗이자 협력자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짤막한 연설 말미에 마르크스를 이렇게 묘사했다 ― "당시에 가장 증오받고 가장 비방받던 사람".-

그 증오와 비방은 특별히 끈덕진 데가 있었다. 대부분의 반항자들과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심지어 혁명가들조차 죽고 나면 더 이상 매도당하지 않는다. 애뉴어린 베번[193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영국 노동당내 좌파의 중심 인물 ― 옮긴이]과 케어 하디[영국 노동당 창립 당시의 지도자로, 소박한 도덕론의 입장에서나마 제1차세계대전을 반대했다 ― 옮긴이], 그리고 심지어 제임스 코널리[20세기 초반 아일랜드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아일랜드 민족해방운동을 노동자 혁명으로 발전시키려 애썼다 ― 옮긴이] 같은 사람들도 비록 생존시에는 사회 상층 사람들의 증오를 받았었지만 죽은 뒤엔 동정과 심지어 존경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에 대한 혐오는 1백 년이 넘도록 지속돼 오고 있다. 거듭거듭 그의 저작은 유해하거나 쓸모 없거나 이해하기 어렵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노동당 소속 총리를 역임했던 해럴드 윌슨은 자기가 마르크스 《자본》의 겨우 첫 두 페이지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윌슨의 이 말은 윈의 책에서도 인용되고 있다(411쪽). 《자본》 첫 두 페이지와 관련해 "본문 두 문장에 주석 한 페이지는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는 윌슨 자신은 젊었을 때 영국 철도 체계에 대한 지루한 주석 달기에 몰두했다.

나는 친구이자 동료인 사람이 쓴 책을 서평하고 있으므로 과장된 찬사나 부풀리기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처지다. 따라서 이 책이 장기간에 걸쳐 탐욕스럽게 수집한 자료와 날렵한 문체와 기지가 넘치는 논박을 결합한 놀라운 책이라고만 말할 수밖에 없다. 〈가디언〉 독자들은 지면을 통해 정기적으로 프랜시스 윈의 이런 매력을 흠뻑 느꼈을 터이다.

그의 저술 목적은 마르크스를 향해 쏟아진 수많은 비방과 증오로부터 그를 구해 내는 것으로, 나는 그가 득의만면하여 성취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마르크스 신화를 하나씩 해체해 버린다.

마르크스는 도그마에 속박돼, 그 때까지 불가사의하게 마르크스주의로 알려져 있던 것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했는가? 윈은 토니 블레어를 포함해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마르크스의 《경제·철학 원고》를 읽어 보면 좋겠다고 한다. 그 책은 마르크스가 26살이던 1844년에 썼고, 거기에는 "끊임없이 탐구해 들어가는, 섬세하고 비교조적인 정신이 드러"난다(101쪽).

마르크스는 영국 박물관 도서관에 갇혀 책만 팠던 침울한 은둔자였는가? 윈의 평전에서 볼 수 있는 마르크스는 딸들에게 못된 자본가들에 대한 동화를 읽어 주는 일이나 윌리엄 셰익스피어 작품을 즉흥적으로 딸들과 가족극으로 연출하는 것을 최고의 낙으로 삼는 자상한 아버지이자 남편이다.

마르크스에서 옛 소련의 수용소군도에 이른 직선이 있는가? 윈은 큰 수고를 들여, 마르크스·엥겔스가 전망한 민주적 사회와 그런 사회에 대한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의 풍자만화가 다름을 보여 준다.

마르크스의 저작은 해럴드 윌슨이 짐짓 가장해서 주장하듯이 정말로 지루했는가? 그렇기는커녕 마르크스는 비범한 재능을 가진 탐사발굴적 언론인으로, 그의 소책자와 논박문은 똑같은 주제에 대한 세련된 저작보다 수명이 훨씬 더 길었다. 가령 파리 꼬뮌 대해 그보다 더 쉽고 통찰력 있는 설명을 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몇 가지 예가 더 열거되지만 중략 ― 옮긴이]

그러나 마르크스가 부자와 권력자의 영속적인 증오를 산 것은 그의 논박문 때문이 아니었다. 발인식 연설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문제의 핵심을 언급했다.

마르크스는 다른 무엇보다 혁명가였습니다. 그의 생애 진정한 사명은 자본주의 사회 전복에 이렇게 또는 저렇게 공헌하는 것이었습니다. 투쟁은 그의 삶을 이룬 요소였습니다.

1844년경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본질이 노동 착취임을 확신했다. 착취 과정에서 광범한 대다수의 인간적 잠재력이 희생되면서 소수가 부유해진다. 확신에 찬 마르크스는 의분에 압도되다시피 됐는데, 이 의분은 그의 인생의 추진력이 됐다.

마르크스는 지독한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았지만 자신의 핵심적인 목적에서 결코 일탈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더 쉽게 스스로 해방될 수 있도록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그 목적이었는데, 그것이 그저 탐구하고 저술하는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 목적에는 조직도 필요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동맹, 나중에는 국제노동자협회(제1차 인터내셔널)가 그런 조직이었다. 마르크스가 쓴 [제1차] 인터내셔널의 개막 선언은 이렇게 역설한다. 노동자 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계급 자신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높은 데서 위로부터 노동자를 해방시키려 애쓴 동료들을 절대 보아넘기지 않았다. 역사가들은 그런 사람들을 추켜세우곤 했다. 하지만 프랜시스 윈은 그런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특히 미하일 바쿠닌은 허풍선이임이 들춰내진다. 프리드리히 라쌀레는 프러시아 왕실에 아첨하는 비열한 사람이었음이, 그리고 영국 사회민주연맹의 창립자 H. M 하인드만은 표절자이자 따분한 사람이었음이 밝혀진다. 이 셋은 모두 노동자들의 조직 능력과 투쟁 능력을 해방하지 않고도 노동자들을 자본주의로부터 자유롭게 하려 애썼다. 마르크스의 딸 엘리너 마르크스가 아버지에게 인류 역사상 가장 찬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그는 자본주의 훨씬 전에 존재한 한 노예 전사의 이름을 댔다 ― "스파르타쿠스"라고. 윈의 책은 미국 언론인 존 스윈턴이 마르크스에게 다음과 같은 단순한 질문을 던진 인터뷰로 끝난다. "[존재의 마지막 법칙은] 무엇입니까?" 마르크스는 똑같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투쟁이지!"(523쪽)

아마도 마르크스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은 그의 예측이 터무니없었다는 것일 게다. 따지고 보면 《공산주의 선언》 이후 1백50년이 흘렀는데도 자본주의는 살아 있고 그것도 잘 살아 있다. 프랜시스 윈은 "마르크스의 낙관주의는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한다. 마르크스는 언제나 어리석을 만큼 낙천적이었다. 모름지기 혁명가란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마르크스의 세계 시장에 대한 비전은 신기할 정도의 선견지명을 보여" 줬다(172쪽). 자본주의 몰락에 대한 그의 예견이 잘못됐음이 입증됐다 해서 그의 역사적 분석의 독창성이나 현재적 관련성이 손상되지는 않는다.

프랜시스 윈은 내가 전에 들어 본 적이 없는 경구 하나를 마르크스한테서 발견해 냈다. "사회 개혁은 절대 강한 자들이 약해짐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 늘 약한 자들이 강해짐으로써 이루어진다."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지만, 미안하네만, 이 책을 쓴 게 바로 몇 달 전에 자기들 중 어느 누구보다 약한 나라에 흉포한 폭격을 퍼부으며 [발칸 ― 옮긴이] 전쟁을 일으킨 지상 최강의 강대국들의 편을 들었던 바로 그 프랜시스 윈이 맞아?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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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 평전》의 영어 원작이 출판된 직후인 1999년 10월 9일 〈가디언〉 지에 실린 서평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서평의 필자는 폴 풋트로, 《칼 마르크스 평전》의 지은이 프랜시스 윈과 함께 〈가디언〉 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