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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포럼 이집트 혁명 토론:
이집트 노동계급이 완전한 해방의 열쇠를 쥐고 있다

▶김인식 〈레프트21〉 발행인 연설 동영상 보기

2월 17일부터 19일까지 열린 “한국사회포럼2011”의 마지막 날, 다함께가 주관한 “격동의 이집트, 중동의 민중 반란과 연속혁명”에는 청중 60여 명이 강의실을 꽉 채웠다.

한국에 온 지 5년 됐다는 이집트인 연사 마흐무드 압둘 가파르 씨는 그동안 무바라크가 이집트인들을 억압하고 분열 지배해 온 행태를 생생하게 폭로했다.

마흐무드 압둘 가파르(이집트 혁명을 지지하는 이집트 사람들 활동가)씨가 발언을 하고 있다.

“무바라크는 생사여탈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가졌다. 무바라크는 군 최고 통솔자였고, 경찰조직을 직접 운영했다. 국회에서 원하는 법을 맘대로 통과시켰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법을 국회가 통과시키면 멋대로 폐기했다.

“이집트 경찰을 보면 이집트 상황을 알 수 있다. 군대가 40만 명인데 경찰은 2백만 명이다. 그 중 다수가 보안경찰이다. 이들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다닌다.

“무바라크는 억압과 분열로 지배했다. 분열의 대표 사례는 무슬림과 가톨릭을 분열시킨 거다. 무슬림들은 ‘가톨릭들은 서방의 지원을 받는다. 이들에게 민주적 권리를 줘서 이들이 표를 얻으면 무슬림들의 삶을 힘들게 만들 것이다’ 하고 말했다. 무바라크는 똑같은 말을 가톨릭도 하게 만들었다.

“언론도 강력하게 통제했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2백만 명이 시위를 벌일 때도 국영 TV에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최근 불만이 폭발할 계기는 칼리드 사이드란 청년이 집앞에서 죽은 것이었다. 경찰은 약물을 팔다가 약을 먹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조사해 보니 이 사람은 경찰이 마약을 판매 하는 장면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린 것이고, 경찰이 보복한 것이었다.

“시위 일주일 만에 무바라크가 졌다는 게 분명해졌다. 그동안 속아 왔다는 것을 모든 이들이 느낀 것이다. 사람들을 분열시킨 주장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모두 깨달았다.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무슬림과 가톨릭의 충돌이 없었다. 도시 안의 도시 같았다. 스스로 깨끗하고 훌륭하게 운영했다.”

21세기 혁명

<레프트21> 김인식 발행인

김인식 〈레프트21〉 발행인은 이집트 민중에게 축하와 연대의 인사를 보내며 연설을 시작했다.

“21세기에 혁명이 가능할 뿐 아니라 현실성이 있다는 점을 북부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의 민중이 보여 주고 있다.

“가파르가 ‘친절한 사람이 화나면 조심하라’고 했다. 트로츠키는 이를 ‘혁명적 보수성’이라고 한 바 있다. 노동 대중이 [삶의 악화에 맞서] 현 상황을 지키다 지키다 안 됐을 때 터져 나오는 게 혁명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싸우지 않는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 혁명을 예비하고 축적하는 과정인 것이다

“무바라크가 퇴진했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여전히 무바라크 정권의 사람들은 남아 있다. 또한 국가의 핵심인 억압기구는 살아남았다.

“군부는 독재의 척추였고 엄청난 특혜를 받았다. 민간 경제 활동의 대주주기도 하다. 군부가 운영하거나 군부에 봉사하는 기업도 많다. … 군부는 해마다 미국에 13억 달러를 지원받아 왔다. 이런 군부가 미국을 거스를 것인지 의심해야 한다.

“이집트 혁명에는 모든 계급이 참여했다. … 그러나 이 정권이 결정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대중파업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이집트 노동계급은 이집트뿐 아니라 중동 전체에서 해방의 열쇠를 쥐고 있다. 연속 혁명으로 나가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노동계급은 이제 경제적 고통을 해결할 요구를 해야 한다. 이 투쟁이 국가 탄압에 직면하면 정치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사회 혁명으로 전환이 안 되면 군부는 피의 보복, 반혁명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성공했지만 7월에 꼬르닐로프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칠레에서도 거대한 운동이 있었지만 군부가 반동을 준비했고 결국 1973년 9월에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타흐리르 광장의 자치 능력이 작업장과 지역사회에서도 실현돼야 한다. 작업장위원회, 지역위원회, 파업위원회의 전국적 네트워크를 건설해야 한다. 이는 이집트 혁명의 성과를 보존·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이다.

“이집트는 최초의 계급사회가 등장한 곳이다. 이제는 이집트가 계급을 없애는 여정으로 나가고 있다. 이것이 가능하기를 바란다.”

자유 토론에서 한 참가자는 이집트 혁명에 관한 흔한 논평들을 반박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같은 SNS는 혁명 확산의 부차적인 수단이었다고 생각한다. 발제에서 나온 것처럼 꾸준히 저항하면서 축적돼 온 운동의 효과가 본질이었다고 생각한다.”

계급없는 사회

최일붕 다함께 운영위원은 이집트 혁명이 연속혁명으로 발전해야 주어진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집트 혁명이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와 세계적 상황이 이전 동유럽이나 한국 등의 민주화 이행 과정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집트는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미국과 이집트는] 미국과 일본처럼 긴밀하다.

“군부는 자기 자신이 자본으로서 경제의 한 축이다. 따라서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제국주의와 군부통치 척결 말고도 토지 개혁과 경제난 해결의 과제가 있다고 했다.

2월 19일 오후 서강대에서 다함께 주최로 열린 "격동의 이집트-중동의 민중 반란과 연속혁명" 토론회 참여자들 뒤에는 이집트 국기가 걸려있다.

이집트 혁명이 직면한 환경도 다르다. 세계경제 위기와 미국 제국주의의 핵심적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이라는 것이다.

“누가 이 문제들을 해결할까? 외국의 원조를 받는 부패하고 소심한 자본가들일까? 이집트의 지식인들일까? 이들은 독자적 경제 기반이 없다. 누가 해결하겠는가? 야당? 야당은 엄청 취약하고 부패했고 타협적이다. 이들이 해결하는 게 가능할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막중한 난제들을 해결할 능력을 가진 사회집단은 노동계급밖에 없다. 이제 노동계급이 역사 무대의 한가운데 등장했다.

“1917년 2월 혁명을 트로츠키는 민주혁명이라 하지 않고 하나의 에피소드 단계라고 했다.이집트 혁명 역시 민주 혁명이 아니다. 아직은 어떤 민주적 과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어려운 길을 가는 것보다는 쉬운 길로 가는 게 낫다. 그것은 바로 노동계급의 정치권력 장악이다. 첫 걸음은 공장, 지역사회, 학교, 거리에서 노동자, 학생들의 민주적 기관을 설립해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션 정리 발언에서 가파르 씨는 “이집트에서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무바라크 제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제도 4백만 명이 모였다. 그들은 매주 이런 시위를 할 것이고 요구가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시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인식 발행인은 과제를 제시했다. “이집트 혁명의 운명을 결정지을 세력은 셋이다. 백악관, 군부, 노동계급. 이 셋이 앞으로 결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집트 혁명의 운명이 결판난다.

“이집트 혁명은 가자지구 국경 개방을 중요한 요구로 제출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가자 국경 개방과 팔레스타인 해방을 요구로 내걸어야 한다.

“이집트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이집트 노동계급이 과거의 혁명에서 잘 배울 수 있도록 말해야 한다. 그 점에서 이들의 성장이 이집트 혁명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